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1940년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 시켰는데요.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신문사를 강제로 폐간 지켰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6년 8월에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은 탄압속에서도 언론의 항일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민간 3대지 가운데서≪동아일보≫와≪조선중앙일보≫가 동시에 무기정간을 당한 끝에≪동아일보≫만이 이듬해 6월 1일에야 정간이 해제되어 이튿날부터 복간하였으나,≪조선중앙일보≫는 영영 문을 닫아야 할 운명에 처했으며≪신동아≫·≪신가정≫·≪중앙≫등 두 신문사가 발행하던 잡지는 모두 폐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하였다가 일어난 필화였습니다.≪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지상에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그의 유니폼의 가슴에 붙어있던 일장기 마크를 말살하였으며 이 사진은 8월 23일자≪오사카 아사히신문≫에서 제공받은 것인데 고의로 이를 말살한 사실이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총독부 경무국은≪동아일보≫사회부장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자를 연행하고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고 손기정의 사진을 실으면서 역시 일장기를 말소했던≪신동아≫9월호에 대해서도 일제는 정간 처분을 내리고 신동아 편집부장을 구속하였습니다.
총독부는≪동아일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고 ≪조선중앙일보≫도 8월 13일자 제3036호 조간 3면에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었음을 알아낸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동아일보≫는 279일이라는 최장기의 정간 끝에 이듬해 6월 1일 복간되었으나, 재정적 기반이 빈약했던≪조선중앙일보≫는 끝내 복간하지 못한 채 1937년 11월 5일로써 허가의 효력이 상실되어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한국어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동아일보≫와≪조선일보≫는 1940년까지 발행을 계속하였으나 마침내 한국어 민간신문은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일제가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전시체제하에서의 물자 부족으로 일본 전역에 걸쳐서 신문사를 정비한다는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출처 - 우리 역사넷 3대 민간지의 폐간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창간 당시부터 민족대변지라는 자각으로 출발하여 창간사에서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라는 3개 주지를 밝히며 일제의 주요 탄압 대상이 됩니다.
베 번에 걸친 무기정간 처분 가운데 첫번째는 일본 왕실의 상징인 3종신기를 비판해서, 두번째는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보내온 3.1운동 6주년 기념축사를 번역해 게재해서, 세번째는 한민족의 항쟁을 고무한 미국 언론인의 서한을 실어서, 네번째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개제해서 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조선·동아 폐간 계획이 담긴 총독부 한 비밀문서는 "조선 통치의 지도정신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인데, 그 완성은 본질적으로는 조선인이 지닌 민족의식의 저류에 의해, 형식적으로는 조선·동아일보의 존재에 의해 저해되고 있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식민지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3/2020032300140.html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 일보의 폐간을 종용 한것은 언론 통폐합 정책의 일환입니다.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가 부족해졌고, 신문 지면이 획일화된 상태에서 굳이 조선, 동아, 매일신보 등 한글신문을 3개나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당시 일제는 각 지방에서 발행하던 일본어 신문을 1개로 줄이는 통폐합 정책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조선, 동아 두 신문이 강제 폐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익을 내는 기업으로서의 신문을 계속 발행하려고 했음에도 일제가 발행하지 못하게 했다. 이 측면에서 일말의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신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논조 때문에 보상도 없이 강제 폐간한 것 같이 얘기하는 데 사실 그건 아닙니다. 조선 일보에는 80만원, 동아일보에는 50만원의 돈을 줍니다. 이 돈은 현재 금액으로 따지면 수백억원에 해당 하는 돈 입니다. 해방 후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차례로 복간하지만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언론의 논조가 점차로 위축되어 기사의 압수, 삭제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930년대에는 신문경영자들이 수지타산을 가장 우선적인 경영방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도 1936년 8월에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은 탄압속에서도 언론의 항일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민간 3대지 가운데서≪동아일보≫와≪조선중앙일보≫가 동시에 무기정간을 당한 끝에≪동아일보≫만이 이듬해 6월 1일에야 정간이 해제되어 이튿날부터 복간하였으나,≪조선중앙일보≫는 영영 문을 닫아야 할 운명에 처했으며≪신동아≫·≪신가정≫·≪중앙≫등 두 신문사가 발행하던 잡지는 모두 폐간되었다.
-출처:우리역사넷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장이 1940년 1월 15일에, 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폐간을 종용받았습니다. 그러나 폐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총독부는 두 신문을 폐간시키는 방침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두 신문사가 폐간을 거부하자, 총독부는 용지통제권을 통해 신문 배급량을 줄였으며, 신문사의 간부들을 연행하는 등의 압박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폐간령을 내려 두 신문사는 완전히 폐간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