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경천사 10층석탑을 분해하여 일본으로 훔쳐간 사건이 궁금합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복도에 놓여있는 경천사 10층석탑.일제가 강점기에 이 석탑을 분해하여 일본으로 훔쳐간 사건이 있었다고 천상의 컬렉션이라는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대체 이 엽기적인 사건은 왜 일어났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경천사지 석탑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황태자가 하사했다고 사기치고 대놓고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합니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 논설을 통해 일본의 다나카를 거명하며 석탑 약탈을 폭로하였으며, 그러자 일본 정부 대변지 '재팬 메일' 이 해당 논설은 거짓이며 석탑 약탈을 부인하였다고합니다. 당시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던 호머 헐버트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3월 19일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천사를 방문한 후 그곳에서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해당 주민의 증언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이후 '재팬 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서 '한국에서의 만행'이라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등 세계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등 석탑을 반환하도록 촉구했고 이후 석탑은 1918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 되었다고합니다. 조선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들끓었던 사건이라고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경천사 10층 석탑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경천사지 석탑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황태자가 하사했다고 사기치고 대놓고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 논설을 통해 일본의 다나카를 거명하며 석탑 약탈을 폭로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 대변지 '재팬 메일' 이 해당 논설은 거짓이며 석탑 약탈을 부인하였다.
당시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던 호머 헐버트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3월 19일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천사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해당 주민의 증언을 인터뷰하였다. 이후 '재팬 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서 '한국에서의 만행'이라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등 세계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등 석탑을 반환하도록 촉구했다. 이후 석탑은 1918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된다. 조선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들끓었다고 한다.
이같은 세계 여론 때문에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본에 도착한 후 포장도 풀지 못한 채 십여 년 넘게 방치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실태조사 후 반환요구를 하여 1918년 다시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셈.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반도가 지속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반환을 요구했다. 쉽게 말해서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딱히 조선의 물건을 조선에 반환시켜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앞마당에 있는 장식물을 훔쳐갔다고 생각한 것.(...)
해방 이후에는 6.25 전쟁 등의 수난을 겪다가 1960년에 서울 경복궁 뜰에 전시시켜 놓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원래 자리(개풍군)에 가져다 놓거나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상태가 유지됐다면 지금 우리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눈으로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출처: 나무위키 경천사 10층석탑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궁내대신이었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탐욕에 의한 자작극이었습니다.
1907년 1월 순종의 가례(嘉禮)에 일본 특사로 방문했다가 혼례가 끝나고
고종에세 하사품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합니다.
고종은 당연히 다나카에게 석탑을 하사해준 일은 없었습니다.
고종이 거절하자 며칠 후 석탑 약탈을 하게 됩니다.
다나카는 고미술 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일본 궁내대신으로
제실박물관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04년에 작성된 <한국건축조사보고>를 통해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 탑을 훔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가,
1918년 11월 15일에 우리나라로 반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