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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6.16

청와대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고 싶어요.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정업무를 수행하는 곳이 청와대잖아요. 이런 청와대는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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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하지 장군이 물러나며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관저를 주면서 그렇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이후 과거 경복궁 북원에 있던 넓은 터의 이름인 경무대(1948년 8월 15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입주한 첫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망치를 들고 가 모든 일본산 전구와 가로등을 깨버리는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와대는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 관저를 이양보다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 입니다.

    조선시대의 지명에 따라 경무대 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 착안하여 청와대 라는 이름을 개칭 하였습니다. 해당 형태로 제5공화국을 지나 민주화를 통해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노태우 정부 말기까지 유지 되었으며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민족의 자존을 높인다는 이유로 한옥 양식의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와대의 역사



    고려조 숙종 9년부터 궁궐터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고려조의 당시 수도이던 개경의 이궁(離宮)터로서 자리를 잡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4년(1395) 정궁인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곳을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하였다. 고종 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 밖(현 청와대 지역)에 중일각, 오운각, 융무당, 춘안당 등의 건물이 지어졌고 과거장이나 관농장, 연무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 청사부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있던 융문당, 융무당을 철거하여 공원화 하였고, 조선총독의 관사부지로 구본관 자리를 선정하여 1939년에 건평 약 586평의 건물을 완성하였으며, 해방후 1945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약 2년 3개월 동안 군정장관(하지장관)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60년 4·19혁명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에 대한 국민의 인상이 좋지 않다하여 “청와대”로 개칭하였고, 그후 박정희, 최구하, 전두환 전대통령이 사용하였으며, 6공화국에 들어와서도 계속 사용하여 왔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한지도 반세기가 지났으며 그동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등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이 널리 알려지고,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쥐위 또한 높아짐에 따라 6공화국 정부는 청와대 본관을 비롯한 주요시설들의 신축, 건립에 착수했다.
    청와대 자리는 고려시대의 궁터였고 조선시대 1426년(세종8년) 경복궁이 창건됨에 따라 궁궐후원으로 정해져 연무장, 융무당, 경노재, 과거장이 서고 왕의 친견장소로 쓰였다. 1927년 일제총독이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을 헐고 관저를 지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궁정장관 관저가 되고, 1948년 정부수립후 대통령 관저로 경무대란 명칭이 붙었으며, 1960년 4.19 혁명후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개칭하였다.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서울시의 주산인 북안산과 북한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시청, 종로, 을지로 등의 상업·업무지역의 북쪽에 위치한다.
    청와대 지번은 일제시대인 1911년 12월 20일 경성부제를 실시할 때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는데, 해방후 1946년 1월 1일자로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으로 개명될 때 세종로 1번지가 되었다. 일제 때 광화문 1번지의 대지면적은 194.911평이었으나 1946년 세종로 1번지로 개정되면서 69.871평으로 조정되었다. 현재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101단, 구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 번지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총 면적이 3개동 73필지 76,685 평에 달한다.
    청와대 일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駱山),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통과해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위치한 세종로 1번지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때인 1104년경, 고려의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곳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는데 숙종때 동경대신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으로 삼았다. 숙종 이후 예종, 인종때까지 게속 번성했던 이곳은 충렬왕의 삼경제 페지로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부터였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째인 1394년 새 수도건설을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물색하게 했는데 고려 숙종때의 이궁터는 협소해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더 남쪽으로 이동해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터에서 좀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 태조는 그해 12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다. 태조 4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복궁이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조선 총독 관저를 재활용하여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쓰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하지 장군이 물러나며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관저를 주면서 그렇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들어와 1426년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궁궐 후문으로 삼아 이곳에 연무장, 융무당, 경농재 및 과거장이 마련, 왕의 친경지로 사용되었고 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청사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 외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지었으며 청와대 본관은 이때 건축한 것입니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조선 총독 관저를 재활용하여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쓰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하지 장군이 물러나며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관저를 주면서 쓰이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정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일본인이 조선 총독 관저를 건립하였죠. 이곳을 제 7,8,9대 조선 총독이 관저로 사용했고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됩니다. 동시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았죠. 하지만 1960년 8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이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하여 회의실·접견실·주거실 등이 있는 2층 본관과 경호실·비서실 및 영빈관 등 부속건물이 있고, 정원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후원 및 연못 등의 미관을 갖추고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1960년 8월까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 ‘경무대(景武臺)’로 불려오다가, 그 해 8월 13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 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御營: 조선시대, 인조반정 뒤에 조직한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 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울안에는 원래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 조선 말엽 경복궁의 뒤뜰에 있던, 각 도의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못됨을 알아보던 집)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되었던 시설이며, 영빈관 등은 여전히 실무에 활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세종로)에 위치한다. 광복 이래 이승만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청와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 기능을 가진 대통령궁(大統領宮)이자, 나아가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 및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행정기구 대통령부(大統領府)를 의미했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 부터는 청와대 영빈관 같은 부분적 실용적 시설만 회의, 포럼 등 일부 실무와 행사용 목적으로 적극 사용하고, 그 외 대부분 시설은 국민에게 전면 개방하여 집무실 기능은 하고 있지 않다. 개방 후 청와대는 문화체육관광부 청와대 관리활용추진단이 운영한다.[1]


    이에 국가기관으로서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비서실을 줄여서 청와대, 청(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집무실이 이전된 이후에는 청와대라는 표현을 쓸 수 없고 용산 청사의 특별한 이름이 없어 이러한 고유명사보다는 기능적 명칭인 대통령실(大統領室)이 사용되고 있다.[3]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 관저를 이양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로, 조선시대의 지명에 따라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 착안하여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고 해당 형태로 제5공화국을 지나 민주화를 통해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노태우 정부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민족의 자존을 높인다는 이유로 한옥 양식의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원수로서 청와대에 근무하는 인원들은 국가원수를 보좌하고 명을 받아 행정부의 장관과 차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하고 행정부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청와대 근무자, 정치인들과 친분이 형성되고 능력이 있으니까 청와대로 파견 간다는 인식도 있어서 청와대 파견 근무 자체가 경력이 되어 복귀 후 행정부 내에서 입지가 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권부(權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