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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용있는불독38
위용있는불독3823.05.06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과전법을 실시한 배경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조선을 개창하기 전 과전법을 실시했습니다. 이성계는 과전법을 왜 실시했으며 과전법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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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전법은 고려 공양왕때 제정된 토지 제도로 관리의 급료로 토지를 분급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제도입니다.

    고려말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 세족들이 겸병, 점찰, 사패, 투탁, 기증 등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면제, 면역의 특권을 누리게 되어 국가 재정은 바닥이 나고 관료의 녹봉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였고 권문 세가의 대토지 겸병과 농장에 대해 토지를 적게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관료와 농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집니다.

    이때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성계 일파가 조준의 사전 개혁 상소를 시작으로 전제 개혁을 당행해 공양왕 3년 5월에 과전법이 공포됩니다.


  • 이성계가 과전법을 실시한 배경에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력을 갖춘 후

    경제력과 정치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실시한 것입니다.

    과전법은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를 중심으로 개혁을 한 것입니다.

    권문세족들이 차지한 농장을 몰수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다시 나누어 갖는 법이 과전법입니다.

    이 법은 고려의 전시과와 원리는 같지만

    과전법은 경기도의 토지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과전법 시행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토지 점유는 국가 재정의 큰 곤란을 야기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및 조선 건국 세력은 곧 토지 개혁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정립된 것이 과전법이었습니다. 수조권이란 토지에 대한 조세 징수권으로서, 1391년(공양왕 3)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과전은 전⋅현직 관료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누어 15~150결을 지급하였는데, 본인 당대에만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과전이 세습화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아울러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까지 수취가 가능하게끔 하였으며, 경기도에 속한 토지에서만 분급하여 불법적으로 과전이 팽창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과전법은 조선 왕조 개창의 물질적 토대로 기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조지 분급을 전보다 축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전법은 다시 개혁 논의를 맞게 되었습니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가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수신전⋅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세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건국 이후 줄곧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과전을 지급받지 못하는 관원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분급하는 직전법, 세금의 수취를 국가가 대행하는 관수관급제 등의 시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거듭되는 흉년과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자, 결국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토지 수조권 자체가 폐지되고, 관리에게는 녹봉만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