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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 나오는 시라소니는 어떤 인물인가요?

오랜만에 유튜브로 추억의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시라소니라는 별명의 인물이 나오잖아요.

근데 야인시대에 나오는 시라소니는 어떤 인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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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가끔활동적인호두과자
    가끔활동적인호두과자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라고 하지만 '호랑이도 자식이 여럿이면 시라소니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양자가 무관한 표현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다.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아오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이라 정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기록이 없을 리가 없다. 이외 알려진 점은 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만나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상하이에서 명성을 떨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의 주특기는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인 공중걸이 박치기 지만 어쩌다 한번 쓰는 일격의 필살기술이며, 온몸이 무기라 할 만큼 강해 주먹이든 발차기든 단연 최고였다. 대중매체에서는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더러 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6.25 전쟁 이후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되어 조직을 해산한 이래 서울의 조직폭력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에 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이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 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된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환(5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내달라' 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 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기홍, 조열승, 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많이 상해버렸다.

    그래서, 이권의 분산과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한 뒤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그를 잔혹하게 린치했다. 이후, 1983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동아일보>에서 과거 린치 사건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의 이권독점에 단신으로 싸움을 걸었다가 이정재의 부하 10명 정도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고 시장바닥에 버려졌다한다. 유지광은 본인이 쓴 회고록인 대명에서 이성순은 이정재의 사무실 앞에서 10대 건달 10명을 때려 눕힌 후, 사무실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무장한 이정재 부하 20명과 싸움을 하다가 전화선에 걸려서 넘어지고 그 틈을 타서 갈고리, 낫, 도끼 등으로 난자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유지광의 회고록 내용은 SBS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도 인용되기도 했다. 반면 야인시대에서는 석회가루를 눈에 뿌려서 시야를 가린 뒤에 집단 폭행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청계천에 망태로 싸서 버려졌는데 행인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무튼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부터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를 시켜 후환을 없앤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서 나머지 다리도 부러뜨리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신상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이정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으나 이를 실행하기 직전에 김두한과 이정재가 화해를 하는 바람에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로는 거의 폐인이 되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중에 3.1 공수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하고 신익희와 장면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 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도중 시라소니 폭행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도 했는데 린치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정재를 감쌌다고 했다. 실제로, 사건과 관한 조사가 검찰에서 실시된 기록이 있으나 이정재의 재판 당시 수많은 죄상 가운데 해당 사건과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없음 불기소처분으로 보인다.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 시라소니는 결국 이정재의 처형 이후부터 조직폭력배 생활을 은퇴했고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에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영락교회 장로로 지냈으며, 2칸짜리 셋방에서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생을 마쳤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아들에게 아래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야인시대의 시라소니는 본명이 이성순 입니다.

    중국에서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 이긴 낭만시대 주먹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손발의 타격과 함께 박치기 기술을 잘 사용했습니다.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조직에 특별히 속해있지 않고 돈이나 명예에도 그리 구애받지 않는 스타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 야인시대에 나오는 시라소니는 실제 인물이며 이성순 입니다. 그때 당시 주먹으로 북한과 만주 일대를 평정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