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라는 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단순히 노동자의 날이라는 것이 생길 정도로 노동시장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킨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분의 일대기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국민학교를 다녔다. 1963년 대구에서 살다가 다시 1964년 상경하여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고,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후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노동조건 개선 시위 기획 등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하였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 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태일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에 취직하고, 1970년부터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노동환경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박정희 정부와 자본기업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다가, 시위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며 근로 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 자살 하여 2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우리 나라 노동운동의 개척자 이자 훌륭한 노동자 였던 분 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1970년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노동운동가입니다.
그의 생애는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 >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을 하셨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봉제 기술자 였던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가난 때문에 거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남대문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1960년에 학생복을 제조하여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7살 때인 1965년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이시기에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환기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거의 여성들 이었고 13~17세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 열사는 어린 여성 노동자 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8년의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되어 그것을 공부하면서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설문으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며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습니다.
1970년 9월 삼동회를 조직했으며 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사업자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일을 잘되지 못하였습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경찰의 방해로 무산이 되자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께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의 분신 항거 자살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의 유언에 따라 2011년 현재까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문학상’, ‘전태일노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88년 11월 전태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개최되면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