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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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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알고 보는 비극은 왜 여전히 슬픈가?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의 파멸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전율합니다.

​결말(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문학은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결말'로 달려가는 인물의 발버둥을 지켜보는 것은 가혹한 즐거움인가요,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숭고함을 확인하려는 본능인가요?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남찬우 전문가입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말씀하신 '가혹한 즐거움''숭고함의 확인' 사이의 정교한 줄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말을 알면서도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이 기묘한 몰입의 이유를 몇 가지 관점에서 짚어보고 싶습니다.

    비극적 아이러니(Tragic Irony)

    우리가 느끼는 전율의 일부분은 분명 관찰자로서 느끼는 잔인한 지적 유희에서 기인합니다.

    관객은 오이디푸스가 죽이려는 자가 본인의 부친임을, 결혼하려는 자가 모친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진실을 향해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우리는 그 '무지'가 불러올 파멸을 예상하며 짜릿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비극은 공포연민을 통해 감정을 정화합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불운에 대한 공포와, 그 짐을 대신 짊어진 영웅에 대한 연민이 뒤섞이며 역설적인 쾌감을 낳는 것이죠.

    하지만 단순히 구경꾼의 즐거움만 있었다면 비극이 수천 년간 인류의 고전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라 '추적'입니다. 그는 멈출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만류할 때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인간의 존엄을 선택합니다.

    신이 짜놓은 그물(운명)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은 처절하지만 눈부십니다. 비록 결말은 패배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집요한 의지는 우리가 단순히 '결정론적인 기계'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문학이 인생과 닮아 있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여행자들입니다.

    우리가 오이디푸스의 발버둥에서 전율을 느끼는 이유는, 결과(죽음)가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인간의 위대함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때문 아닐까요? 가혹한 운명이라는 배경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촛불이 가장 밝게 빛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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