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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11.09

조선 삼포왜란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난 것 인가요?

조선시대 때 삼포왜란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삼포왜란은 왜 일어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이유때문인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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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0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포왜란은 1510년(중종 5년)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생한 대규모 폭동입니다.

    삼포왜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조선 건국 당시 왜구들의 난동은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까지 골치를 썩이게 하는 요소였습니다. 왜구들은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 집단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상당히 많아서 일부 다이묘들은 왜구를 매수해서 전력에 보강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까지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공격할 것을 명했습니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대마도와 왜구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한편 부산포와 염포(현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지역), 제포(또는 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등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화책도 병행했다. 그 결과 왜구들의 수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0년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사건입니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한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 , 1426년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으며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해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이라 하여 거류한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해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제기됩니다.

    삼포에는 거류 왜인을 총괄하는 그들의 책임자가 있어 일정한 조직 체계 아래에서 활동, 대마도주는 이들 조직체를 통해 공물로서 면포를 받는일까지 있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세종 때부터 그들의 토지 경작에 대한 수세론이 논의되다가 1494년에 이르러 거류 왜인의 경전에 대해 수세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면세 혜택을 베푸는데 이러한 관용책을 악용,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고 연산군때를 거치면서 그 도가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이에 1506년 중종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해 법규에 따라 엄치 통제를 가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포 왜란의 직접적 요인으로는 성종 때 이래의 엄격한 교역 통제책과 연산군 때 운영상의 모순에 대한 일본인, 특히 대마도인들의

    불만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연산군의

    실정에 의해 조선 정부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통교 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변방을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번번히 발생하자

    왜인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연산군 때에 이미 왜선의 해적 행위와 삼포 항거 왜인에 의한 방화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