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부인 29명 너무 많은데 바람둥이인가요?
고려시대, 왕건의 부인29명인가요? 어마어마 하네~ 왜 그렇게 많은가요?
저라면 그러지 못할텐데 왕건의 권력때문에 그런가봐 모르겠지만 설마 바람둥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람둥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부분이있습니다.
왕건은 새나라를 건국하며 권력을 탄탄히 하고자 각지방의 실권을 쥐고 있는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했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 계약 혼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삼국시대는 어떤 세력이 얼마나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시기였습니다.
왕건은 성공했고, 궁예ㆍ견훤은 실패한 거죠.
- 사성정책: 항복한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줌
- 혼인정책: 힘 있는 호족들과 결혼으로 가족이 됨
- 기인제도: 지방 향리의 자식을 뽑아 개경에서
일하도록 정한 제도(일종의 인질)
- 사심관: 힘 있는 호족 공신을 고향의 사심관으로
보내 그 지역의 향리를 통제했던 제도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건의 부인 29명의 고향을 자세히 살펴 보면 전국 각지의 호족들의 자식들이 였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전부 다 고향이 틀립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떄 후삼국에는 호족들의 권력이 워낙 막강해서 왕권은 호족 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정략 결혼을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권강화를 위해서
왕건은 세력이 강한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 29명이나 되었는데
29명 중 첫 번째 부인 신혜왕후와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를 제외하고는
전부 호족과 연합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일생 동안 29명에 이르는 많은 후비를 두었다. 태조는 29명에 이르는 부인들로부터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얻었다. 태조가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두게 된 것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강력한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략결혼 외에도 왕가의 혈통을 확장시켜 왕실을 공고히 하고자 한 의도도 있었다.
고려 시대 왕실 여성들은 각각 그 위치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예컨대 왕의 모는 왕태후라 부르고 적처는 왕후라 했으며 첩은 부인이라 호칭했다. 따라서 29명의 후비들은 각각 그 위치에 따라 그 격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