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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견한오솔개199
대견한오솔개199

중국역사에서 측천무후의 평가가 약간 엇갈리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중국 역사에서 여황제로는

유일하다고 알고있는 측천무후에대한

인간적인 또는 도덕적인관점에서 평가와 달리

다른 정치나 경제전반에 걸친 평가는 조금 다른것같은데

구체적인 근거와 중국인들의 시각은 현재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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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로, 뛰어난 정치적 역량으로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잔인한 통치자로도 알려져 있어 평가가 다소 엇갈리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천무후는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붕어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의 거의 감춰지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무후에 대해 영 부정적인 인상이 강한데 잔인한 숙청과 공포정치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관롱 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 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제국은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으로 세워진 것으로 애초에 당 왕조의 전신이었던 수 왕조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을 위시로 한 거대 세족들의 반발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 왕조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습니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태종 이세민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강력했고 이들은 속칭 무천진 군벌로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쓸 정도였습니다. 태종 말년부터 당나라의 정치 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고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생산력 또한 수문제의 시절 개황성세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 또 고종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입니다.

      개국 이후 수성에 있어 왕조의 안정을 위한 질서를 다잡야아 한다는 걸 상기하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합니다.

      즉 측천무후는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해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이런 작업은 매력없고 잔혹하며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고 ,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으나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측천무후는 당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의 여제입니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이라고도 부릅니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중국의 유일한 여제였던 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만들어진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부정적 평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 때까지의 평가였다면 청말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평가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