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학문

역사

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삶과 희생정신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20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신 전태일 열사는 노동자의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 분신을 한 노동운동가로 알고 있는데요.

그의 삶과 희생정신,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바뀐 노동 환경과 마지막으로 한계점에 대해 알려주세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전문가 답변 평가답변의 별점을 선택하여 평가를 해주세요. 전문가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제 개발과 반공을 국정 과제를 내세운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주도형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은 다함께 잘사는 국가가 아니라 재벌과 기업을 위한 경제 개발이었으며, 노동자들은 저임금의 희생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전태일은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며 회사측과 정부 당국에 호소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에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 세력이 노동자들의 권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노동운동의 활성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그의 희생정신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국민학교를 다녔다. 1963년 대구에서 살다가 다시 1964년 상경하여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였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고,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습니다. 이후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노동조건 개선 시위 기획 등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하였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했는데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선생님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기로 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저항과 단체행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