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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국밥집에서 살해한 일본인은 명성황후를 죽인 범인이 맞나요?

최근에는 김구가 죽인 사람이 일본사람 중에서 군인도 아니고 더구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일고 있습니다. 혹시 역사적으로 어느 쪽이 진실인가요? 이것은 김구의 실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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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치호피 사건은 1896년 3월 9일 아침 7시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21세의 백범 김구가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국모보수란 대의명분으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쓰치다는 일본 장기현에 고용된 계림장업단 소속의 상인이라 보고하나 계림장업단이 창설된 것은 1896년 5월 17일로 치하포 사건이 벌어진 3월 9일로부터 2개월 넘게 흐른 다음의 일이라 쓰치다는 계립장업단에 소속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편 김구 본인은 백범일지에서 쓰치다가 일본도로 무장하고 변복을 한 채 조선인 행세를 했던 점을 미루보아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독균같은 존재가 명백하다고 판단했으며 살해 후 행장을 검색한 결과 그가 일본 육군 중위였음을 확인했다고 서술합니다.

    결정적으로 1920년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인 야마자키 게이이치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에 대해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는 김구는 민비 사건에 분개하여 소위 국모보수의 소요가 발생했을 때 일본장교를 살해한 관계자로 형벌을 받은 일이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당시 사건을 심문한 일지와 재판 기록에 따르면 김창수는 엽전 800냥을 탈취할 목적으로 일본 상인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있으나 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일본 외무성이 개입한 흔적이 있어 공문서로서의 중립성은 확보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심문일지와 재판기록에서도 김구 본인은 일관되게 엽전을 탈취하지않았다고 증언, 그를 살해한 동기는 오로지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실제 쓰치다가 소유하고있던 엽전 800냥은 김구로부터 압수 내지 , 추징한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치하포의 주막 주인으로부터 그대로 회수한 것입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쓰치다가 평범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정설인 상황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치하포 사건(鵄河浦事件)은 1896년 3월아침 7시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21세의 백범 김구가가 일본인쓰치다 조스케를 국모원수갚기란 대의명분으로 살해한 사건 입니다.<백범일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쓰치다가 일본군 관계자( 일본 중위)로 많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쓰치다의 정체가 ‘평범한 상인’이라는 주장과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는 주장들로 나뉜다고 합니다. 사실 정확한 사실은 알려 진바 없으며 일본과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