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우리나라에 패션 트랜드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패션 업체들은 소비자들이 지속되는 방법에는 지루하고 누구나 조금씩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심리를 반영하여 사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냅니다 소비자의 취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이 변화에 따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고 시대와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특정한 취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연구결과입니다 패션 트렌드는 다음과 같은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사람들의 취향에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생명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트렌드가 되는 패션 아이템에 따라 어떤 것은 2년 이상 유행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6개월 정도 유행하다가 소멸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트렌드는 대중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트렌드는 현재를 반영할 수 있다고 하지요 즉 과거와 다른 개인만의 독특한 새로운 스타일을 모두 트렌드로 말하지 않고 패션 리더들이 소개하는 다양한 혁신적인 새로운 스타일 중에서 다수의 동시대 소비자가 받아들이는 취향이 유행이 되면 그것이 곧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4.02.22
0
0
티비 사극에서 손가락을 이용해 양치하는 것만 보았는데 고대 사람들도 칫솔을 사용하여 양치질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칫솔 치위생을 위한 인류 최초의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불교의 법전에서 보듯이 고대인들은 청결 유지를 위해 나무 가지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쑤시개를 만들거나 끝부분을 브러쉬처럼 풀어서 치아 표면을 닦기도 했습니다 나무에 섬유질은 침분비를 촉진시키는데 침은 음식물 찌꺼기를 중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또 나무 향이 입안에 남아서 구취도 제거됩니다 언젠가 tv에서 창호지를 씹으면 입 냄새가 제거가 된다는 내용이 방송됐었는데 그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집트 파라오 무덤의 발굴 과정에서도 치아 막대기들이 출토됐고 이 도구는 얇은 나뭇가지나 섬유질이 많은 관목의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이 치아 사이나 혀를 닦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4.02.22
0
0
명나라는 언제 청나라에게 멸망당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주족인 누루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유능한 군사 사령관이었고 이미 팔기제의 여덟 군단들 중 두 개의 군단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집권 초기에는 연달아 군사적인 실패를 맛보았지요 여진족은 1627년에 또 다시 한족 원승환에게 패배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다만 이는 명나라가 서양에서 수입해 온 포르투갈산 대포 때문이기도 하였죠 기술적 수적 열쇠를 극복하기 위하여 홍타이치는 1634년에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유럽식 대포들을 다룰 줄 아는 새로운 포병을 창설했고 1635년 11월에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통합을 선포하여 분열되어 살던 여진족들에게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홍타이치는 이후 사내관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에게서 빼앗아 왔고 내 몽골의 링단 칸을 완전히 굴복시켰고 1636년 4월 내몽골의 몽골 귀족들 만주 귀족들은 선양에 모여 쿠릴타이를 열었고 후금의 칸을 새로운 청나라에 천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637년에는 명나라에서 투왕하는 한족들은 살려 두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한족들은 학살하고 노비로 만들었지요 홍타이즈는 조선일들도 팔기군에 포함시켰고 명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하고 홍타이지가 1640년에서 42년까지 명나라를 상대로 연정 연승을 거두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의 황제 숭정제가 역모를 의심하고 원숭환 장군을 사형에 처해 버리면서 명나라는 갈수록 멸망의 길을 향해 치달았지요 이후 명나라는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고조선은 예맥족이 세운 국가라고 볼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는 고조선,고구려,옥저,동예 등 주류를 형성한 고대 한국 민족인 예맥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에도 부여가 예맥 땅에 있었고 고구려를 맥인 또는 예맥이라고 칭하면서 언어와 법칙이 대체로 부여와 같은 부여 별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 (양력 6월 7일)에 장군 신립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충청북도 충주인 탄금대에서 싸운 전투인데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평야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식민사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식민사관이란 일제강점기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일제에 의해 정책적, 조직적으로 조작된 역사관을 말합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진시황은 왜 여불위를 죽이지못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여불위는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훗날 진시황의 생모가 된 조희였습니다이 때문에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 라는 설이 있지요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성을 남에게 주는 일이 전국시대에 종종 있었기 때문에 사마천 시기까지만 해도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하지만 카더라 하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창작물에서도 십중팔구 이 가설을 채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파타세카라는 노예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인 1828년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태어난 파타세카는 키 218cm 강인한 체력, 건장한 신체, 순종적인 품성, 높은 지능으로 지수로부터 강인한 노예 생산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되어 번식 노예로 채택이 됐습니다 그는 힘든 육체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었으며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번식을 위해 1898년 해방될 때까지 수천 명의 여성과 강제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했으며 지주는 그를 다른 지주들에게 번식 목적으로 임대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지주의 가임기의 여성 노예들과 자의적이지 못한 강제적인 성 생활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르는 섹스를 거의 매일 어떨 땐 다수를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전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에서는 언제부터 둥근 메달을 수여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제1회 올림픽 대회는 금메달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1위 선수에게 은메달과 올리브가지, 증명서를 수여했습니다 2위 선수에겐 동메달과 월계관, 증명서가 주어졌고 3위 선수에겐 메달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메달권에서 벗어난 선수들은 기록에도 남겨지지 않았다고 하며 금메달이 등장한 것은 제2회 대회부터입니다 1900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부터 금,은,동메달을 수여하기 시작했어요 파리 올림픽 대회 메달은 조각가이자 메달리스트인 프레데릭 베르농이 디자인했는데 당시 메달은 원형이 아니었습니다. 42× 60mm의 사각형 메달을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이 사각형 메달은 표창이나 기념의 느낌이 강해 매달러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1904년 제3회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 원형 메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를 막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 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우리가 한 가지 중대히 생각할 것은 오늘 우리가 건국 초창기를 맞아서 앞으로 건설할 사업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요 지난 일에 구애되어 앞길에 장애되느니보다 과거의 흠절을 청쇄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쇄신하고 국가의 기강을 밝히기에 표준을 두어야할 것이니 입법부에서나 사법부에서 왕사에 대한 범죄자의 시효를 극히 감축하기에 힘쓸 것이요 또 증거가 미분명한 경우에는 관대한 편이 가혹한 형벌보다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무너졌던 나라가 세워졌으니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의미였습니다
학문 /
역사
24.02.21
0
0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