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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인권이라고 하는건 자연권과 다른건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부인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권리 생명과 재산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사상입니다. 자연권은 자연법상의 천부인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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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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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아편전쟁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세기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과 면화를 수출하고 청나라로부터 홍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습니다. 특히 홍차를 많이 사갔는데 청나라는 은을 받고 홍차를 팔았는데 당시 엄청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청나라로 들어가면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손실을 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과의 무역을 제한하여 광저우 항구만 개방하고 공행(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정부에서 허가를 내준 상인조합)과만 무역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영국은 계속 손해를 보자 청나라에 물건을 팔 수 있는 지역을 넓혀달라고 요청했고 청나라는 거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역으로 인한 손해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청나라가 약으로 쓰려고 아편을 수입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청나라 몰래 시장에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청나라에는 아편중독자가 늘어났고 영국이 수입하는 홍차의 양보다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아편의 양이 더 많아졌고 영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청나라 정부는 영국 상인들이 갖고 있던 아편을 빼앗아 불질렀고 이를 빌미로 영국은 1840년 6월 청나라를 공격했고 청나라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중앙정부도 어수선했기때문입니다. 결국 1842년 8월 청나라는 영국에 항복하고 난징조약을 체결합니다. 난징조약에서 영국은 청나라 5개 항구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역을 할 수 있고 홍콩섬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영국은 많은 이익을 얻지 못하자 1856년 영국 상선에서 청나라 관리들이 청나라 범죄자를 잡는 과정에서 영국기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제2차 아편전쟁을 벌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공격하여 텐진조약으로 더 많은 항구개방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아예 베이징을 공략해서 베이징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로써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의 각축장이 되고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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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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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왕건의 고려와 교류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견당사와 견신라사는 일본 고대사에서 일본 문화의 기초를 헝성한 공로가 크다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9세기말 견당사와 견신라사를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대외적인 외교관계는 끝납니다. 당나라에 조공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견당사는 당의 발달된 문물과 불경들을 들여왔으며 신라에서도 발달된 문물을 들여오는 등 일본 문화 발전에 공헌했으나 당의 쇠퇴와 일본에서도 권력관계가 변하여 이노우여 기요시는 자국 문화에 자족하고 왕성한 탐구와 모험심을 잃어버리고 일본의 항해술과 조선업의 쇠퇴로 견당 파견을 폐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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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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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시장,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찰사입니다. 관찰사는 조선시대 각 도의 지방통치를 관활하던 종2품의 지방장관입니다. 관찰사의 주요기능은 지방관 감찰과 지방장관의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전기에는 지방관 감찰이 중시되다가 후기에는 지방장관으로서 도내의 행정사법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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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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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어떻게 보급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곡잡량은 제공하는 열량이 육류보다 매우적고 생식이 불가능하여 취사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급부대가 필요하고 수많은 전투가 보급문제로 실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몽고군은 보급면에서 유로음식으로 물을 부으면 바로 우유로 변하고 건육은 독특한 비밀무기가 되어 신선한식물로 변한 것입니다. 몽고인들의 우유는 산화 후 응고하여 요구르트로 만들어 경화로 양간등으로 내락이라하여 건두부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영양가치가 높고 포만감을 주어 보존과 휴대도 용이하여 물만으로 곧 즉석음식으로 변합니다. 몽고마도 지형적응능력이 강하고 인내심도 강해 풀을 먹고 소화능력도 좋아 악조건도 체질적으로 이겨냅니다. 몽고 기병의 승리요인은 환경극복에서 온 용맹과 인내심 보급의 간단함과 잔인한 도살로 가장 관건인 것은 정복지에서 병력을 간단없이 보충하여 원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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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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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조선은 어떤식으로 서로 교류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가 외침을 1000여 차례나 당했는데 그 중 780회가 일본에 의한 침략이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살해 약탈과 노략질 부녀자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해왔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나라는 때론 회유하기도 하고 때론 정벌에 나서기도 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써왔으나 워낙 땅이 척박하고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고려 창왕때인 1389년 박위가 병선 100여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를 진멸씨키고 고려 민간인포로 100명을 찾아온 기록과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이 오도병마처치사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세종 때인 1419년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여 대마도도주인 소 사다시게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가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명나라로 가던 중 해주해안을 약탈하였습니다. 왜구의 창궐과 약탈이 새도주 소 사다모리 때문이라고 보고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삼고 우박 이숙묘 황희를 중군절제사 박초 박실을 좌군절제사 김을지 이순몽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삼남의 병선227척과 병사 17,000명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여 대마도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으나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회유책으로 고려시대에는 미곡을 제공해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통신사를 보내 두나라의 교류와 화친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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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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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에서 고려에 공격을 금지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거란과 강화하여 관계를 수립할 무렵 요동에는 여진이라는 새로운 세럭이 등장합니다. 여진은 1115년 금을 건국하기 전부터 고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말갈의 후예인 여진은 발해와 밀접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발해를 자기와 동일한 족속 혹은 역사공동체의 성원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여진의 주요근거지인 갈라전(지금 연길남쪽)은 두만강 이남에 위치하여 고려와 직접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 여진은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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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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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도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불교사상은 인도북부와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된 대승불교와 인도남부와 미얀마 실론 태국 등으로 전파된 소승불교로 나뉩니다. 대승불교(북방불교)는 큰수레라는 의미로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하며 보살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소승불교(남방불교)는 개인구제에 목적이 있으며 아라한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설과 평등적 세계관 주체적 인간관은 별반 다르지 않고 윤회의 업보를 끊기 위해 해탈 즉 열반에 들 것을 강조한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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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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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신분구조는 사농공상으로 농업을 중시하여 본업이라하여 농자천하대본야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상공업은 말업이라고 하여 천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통해 급제하거나 글을 깨우친 선비가 으뜸이고 다음이 농사를 짓는 것이며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은 말업으로 천대했기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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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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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기황후는 정확히 어떤 관계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황후는 원나라 혜종 우카가투 칸 토곤테무르의 3번째 황후로 혜종의 제2계후이자 3번째 정실부인입니다.기씨의 고려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기설렁거 올제이 후투그라는 몽골식 이름만 전해집니다. 기황후가 득세하자 고려가 받은 악영향은 매우 심각했는데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자 고려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기황후는 자신의 친정인 행주기씨 가문의 잇속을 챙기려고 고려에 많은 간섭을 행사했으며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도 갖은 패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31대 공민왕 왕전은 1356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부원배 기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조리 숙청하고 맙니다. 이에 기황후는 격노하여 1363년 덕흥군 옹혜를 고려의 국왕 조카 기삼보노를 고려의 왕세자로 삼고자 원나라 군대 10,000명을 보내 고려를 침공했으나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였습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들을 유력자에게 선물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기황후는 사후에 고려에 묻힐 것을 원했으나 공민왕은 자신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옹립하려던 기황후를 순수히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추정합니다. 기황후가 고려에 묻혔다는 기록이 어디에도없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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