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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원나라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공민왕은 원이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때마침 원나라는 권력다툼과 주원장의 홍건족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 관심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개혁정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건설한 주원장은 더 많은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고 철령위 땅을 내놓을 것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대장군 최영은 요동을 정벌하고자 군을 파병한 것입니다.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주장하면서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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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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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가정보원의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가정보원의 전신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 실세 중앙정보부였습니다. 5.16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정보의 중요성을 역설한 김종필 중령의 건우로 중앙정보부를 신설하여 모든 정보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으로 쏴서 죽이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경호실 요원들 등 사망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들은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 변경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98년 김대중 정권은 안기부의 국내정치 개입을 제한하고 해외첩보에 주력한다는 의미로 국가정보원으로 명칭 변경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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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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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시대에 위구르제국이 있었는데 이 위구르제국의 역사가 100년도 안되는 극도로 짧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700년대 중반 위구르족은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서 몽골 초원의 패자였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바스밀과 카를룩도 물리쳤습니다. 오르두 발릭에 수도를 세우고 당나라로부터도 인정받아 위구르 제국을 성립시켰습니다. 제국의 기반도 세력도 권위도 없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적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도전하는 적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런 위구르에게 역학관계의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 안사의 난입니다. 건국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안사의 난 초창기부터 위구르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756년에 기마병 3000명을 757년에 4000명을 더 파병하여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는데 역할을 다했고 안사의 난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댓가로 당나라로부터 매년 20000필을 포함한 물자를 받게 되면서 세력을 더욱 충실히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제국이 된 것입니다. 781년 마니교를 국교로 정하고 마니교의 육식금지에 따라 초원에 밭을 갈고 채소를 기르게 됩니다. 이후 강해진 위구르는 당나라를 협박하여 더 많은 물자를 강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당나라와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당나라는 모든 물자를 차단시켜버립니다. 물자부족을 겪던 위구르는 주변국들에게 강탈을 했지만 당나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고 주변국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820-830년 소례가한시대 세력은 가장 강했으나 그 뒤를 이은 창신 가한이 839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사망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번지면서 가축들이 몰살당하자 역량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런 국면 속에서 위구르는 키르키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위구르족에게 당해왔던 키르키스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해서 10만대군으로 공격을 감행합니다. 결국 위구르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위구르의 군소집단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사라지게 되었고 일부가 튀르크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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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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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는 왜 사자왕이라 불린건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38년 7월 31일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20km떨어진 루앙의 대성당에서 가로 12.2 세로 23 높이 17cm의 납으로 된 상자가 발굴되었습니다. 이 상자의 표면에 씌여진 히크 이아케트 코르 리카르디 레기스 앙글로룸(HIC IACT COR RICRDI REGIS ANGLORUM) 우리말로는 여기에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의 심장이 있노라는 뜻입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사자왕 리처드 1세의 심장이 발견된 것입니다. 리처드 1세(1157-1199)는 영국 왕 헨리 2세의 여덟아들 중 가장 용맹스러웠습니다. 1, 2차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세력의 왕 살라딘은 대규모 침공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병력을 이끌고 3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합니다. 머나 먼 이국에서 생활은 매우 고되고 힘들어서 프랑스 필리프 1세는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리처드 1세는 끝까지 남아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무찌르고 살라딘을 위협했습니다. 덕분에 리처드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용맹하다는 의미로 사자왕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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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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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을 현재 어떠한 연합종족으로 추정하는지 최근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흉노는 상고시대부터 5호16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속했던 유목민 집단 및 이들이 세운 국가의 이름입니다. 세계 최초의 유목 제국이었습니다. 첫 등장은 4세기 말 전국시대부터이고 이후 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의 최강의 유목국가로 성장했습니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 몽골 고원에서부터 러시아 남쪽에까지 달하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내몽골 간쑤성 토하리스탄까지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전한 초기엔 한나라를 압박하면서 한고조 유방을 백동산 포위전에서 사로잡을 뻔도 했으나 이후 화친으로 돌아섰고 전한의 형님의 위치로 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무제 시절엔 전한과의 데스매치 끝에 북쪽으로 밀려났고 나라가 두개로 나뉘어지면서 중원에서의 패권을 상실하고 맙니다. 결국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약화되더니 끝내 흉노족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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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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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돼지고기를 사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힌두교도가 80%정도여서 소고기를 먹지 않으며 이슬람교는 13%정도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육식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못먹는 것이 아니라 안먹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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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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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민간신앙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된 것과 다르게 민간신앙은 계속 번창하였습니다. 금무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서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제한되었습니다. 특히 무격을 전담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ㆍ활인서 등이 있었습니다. 또 기우 기은 기자 산천제 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아서 하였으며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 또는 무녀들을 두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사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복무가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 못지 않게 성행하였습니다. 영성단과 노인성당을 서울 남쪽에 두었고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산신제는 백악산 송악산 감악산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산과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밖에도 천신 삼해신 칠독신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습니다. 동물신으로 산신인 호랑이를 비릇하여 재산신으로 숭상되었던 두꺼비 제주도 사귀당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신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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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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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정말 사도세자를 죽일 의도가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도세자는 영조가 아껴서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받았고 1739년(영조 15) 5살에 영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였고 1742년 8살에 종묘에 참석하는 의식에 세자를 참여시켰는데 세자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1747년 궁안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으로 피신하여 문안을 드리지 못한 일이나 공식적인 만남이 있을 때만 만나고 만나기를 주선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만날 정도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는 친밀함이 적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세자교육을 강압적으로 받아왔고 영조가 직접 친문하는 지리에서 압박감을 느낀 세자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여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이것이 궁녀를 겁탈하고 궁인들은 살해하는 만행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동궁을 사칭하면서 사가의 여인들까지 겁탈하는 만행들이 발생하기도 하자 왕실의 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1757년 1758년 사도세자의 병이 깊어지면서 발작할 때는 궁비와 횐시를 죽이고 괜찮아지면 후회하곤 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려 했으나 폐하지 못했는데 영빈까지 세자의 일을 고하자 결국 폐서자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폐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혀있던 세자는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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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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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농경 5천년 문화 역사 농경 사회의 허수아비의 유래는 옛날에 지극한 효자 부부가 비 가림막으로 만든 볏짚을 벗어서 지게에 걸어 놓은 것이 허수아비의 시초입니다. 옛날에 효자부부가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날짐승들이 곡식을 따먹어 수확량이 줄어들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병수발에 약초를 캐러 갔다오면 새들이 곡식을 다 따먹어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새들이 따 먹은 만큼 저녁을 굶기로 하고 몇날 몇일을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식량을 아껴서 부모님 병환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어느날 용한 의원 집에 약을 지으러 가는데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자 볏집으로 엮어서 입고 집에 와서 지게에 걸어놓고 산에 갔다 왔는데 멍석에 널어 논 곡식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텃밭과 논에도 새들이 없고 멀리서 지저귀고만 있었습니다. 지게에 걸어둔 볏짚을 사람으로 착각해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 허수아비를 논밭에 세워놓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허수하다의 옛말이 허소하다인데 얼마쯤 비어서 허전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허소가 변한 허수에 아비가 붙여진 이름이 허수아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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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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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종이 경국대전을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최고 법전입니다. 조선 세조 대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대에 들어 완성 반포되었습니다. 세조는 즉위와 더불어 영원히 변치 않는 대법전을 편찬하려는 뜻을 품고 육전상정소를 신설하여 육전상정관으로 하여금 편찬케 하고 세조가 스스로 심의 수정을 보았습니다. 1467년 세조는 수정 심의를 하다 끝을 못보고 죽게됩니다. 이듬해 1월 1일 시행키로 했으나 그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합니다. 성종 즉위 후에 다시 수정의 의견이 일어나 교정을 가한 후 1470년(성종 1) 드디어 완성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입니다. 이 신묘대전에 대한 논의로 1474년(성종 5)에 새롭게 고쳐진 갑오대전이며 이것 또한 심의 수정을 거쳐 1년 뒤인 1484년(성종 15) 12월에 완성되어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한 6전이 을사대전입니다. 오늘날 전해져 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이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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