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발해는 국가 이름을 발해라고 지었는지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는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당의 강제이주정책으로 28000호가 당나라로 이주당했으며 이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는 효과덕으로 작용했고 2-4세대에 이르기까지 먹혀들어가는 듯하였으나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발해가 만주 동쪽 변방에서 건국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등으로 구성된 발해는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진이라고 했다가 뒤에 대조영이 발해군왕으로 봉해지면서 발해라고 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다만 일본과의 교역시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진이라는 국호는 걸걸중상이 즉천무후에게 진국공으로 책봉된 것에 근거한 것으로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을 자칭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무역거래에서 스스로 고려로 칭한 것은 속일본기에서 확인됩니다. 당나라에서는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부르다가 문왕 때 발해국왕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계승한나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대 선왕 때는 영토확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중원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발해는 9세기 경 신라와 당처럼 지방 통제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거란의 요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228년의 역사를 갑작스럽게 마감하고 맙니다. 요나라 태조 아율아보기와 야율요골의 기마대에 상경이 함락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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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왜 사이가 안 좋은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슬람교는 무함마드 사후에 후계자 문제로 나뉘게 됩니다. 후계자를 회당에서 선출할 수 있다는 수니파(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로 19억명의 이슬람교도 중 85%차지)와 무함마드의 혈육인 시아트 알라를 칼리프로 선정해야 한다는 시아파(종주국 이란으로 15%차지)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관계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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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이후에 우리나라는 임시정부가 세워졌었는데요 근데 알고 있기로는 이 임시정부가 한개가 아닌 두개였다고 하는데, 왜 두개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1919년 4월 한성정부가 서울에서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규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건의하여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 등 20명이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수립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1919년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선생을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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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귀걸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97년 발발한 정유재란은 조선과 일본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무덤을 남겼습니다. 일본 쿄토에는 일명 귀무덤으로 불리는 코무덤이 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 정면에 있는데 쿄토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와 묻은 무덤입니다. 원래는 코무덤인데 잔인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왜군들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 군인 뿐만아니라 일반인들의 코도 소금에 절여 보냈고 히데요시는 코 영수증까지 써주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 12만 6천명의 코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을 전리품으로 생각한 일본인들의 잔인함과 조선인들의 원혼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에는 명랑대첩 당시 사망한 일본 수군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인근 울돌목에서 대패해 숨진 왜군 100여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죽어서나마 고향 일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동남향 해변 양지바른 산자락에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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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의 창업군주로 천태조나 천명제는 잘 사용하지 않고 누르하치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누르하치는 1583년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습니다. 그러자 명나라가 해서여진하고만 무역을 하겠다고 금수조치를 내립니다. 반기를 든 그는 만주를 통합하고 명나라를 처들어갔다가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패한 뒤 사망하였습니다. 누르하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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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종 천리장성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쌓은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동북 변경의 여진족 서북 변경의 거란족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건국 이래 고려는 변경의 방비를 위해 관방(변방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 시설을 쌓았는데 1014년(현종 5)에서 1030년(현종 21)에는 동북 서북 양면 요새 여러 곳에 성곽을 쌓았습니다. 압록강에서 원산만까지 1천리에 달한다고 하여 천리장성으로 불리며 고려장성이라고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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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 때 개경 환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인종 때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일을 말합니다. 1270년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신하들은 개경 환도를 주장합니다. 개경 환도는 몽골에 항복을 의미하며 이후 고려는 원의 속국이 되어 정치적으로 간섭을 받게 됩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저항했던 삼별초의 난도 진압되고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군사를 보내야 했으며 철령 이북 영토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원나라에 내주었고 2성 6부를 첨의부 4사로 바꾸는 등 정치적 간섭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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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근왕운동은 무엇인지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85년 베트남의 실권자 똔텃뚜옛이 어린 황제 함기를 데리고 궁중을 탈출하여 광찌지방의 산간지대에 거점을 확보하고 근왕령을 반포하여 의군을 조직하고 프랑스군대와 싸운 독립운동입니다. 1883년과 1884년 두 차례 프랑스와 맺은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더욱이 1885년 청불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영향력이 없어지자 프람스의 정부에 대한 간섭이 노골화되었습니다. 이에 당시 전국의 문신들이 대불전쟁에 나설 것을 호소한 황제의 근왕령에 호응하여 지방의 학자와 지주들이 각지에서 의군을 일으키게 됩니다. 프랑스측은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는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무위신호의 조서를 발표하여 황제 함기의 망명조정을 불법화하고 동조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한 반면 투항하는 문신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항복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1988년 11월 함기가 산지 소수민족의 밀고로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되자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써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인 판딘풍과 호앙호아탐은 그후에도 장기간 프랑스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들이 계속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우수한 조직력 무기의 근대화 및 농민들과 밀착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19세기 한국의 우정척사운동과 맥을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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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이 일어난 당시 상황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와 거란의 요나라는 993년 1010년 1018년(1019년) 세 차려에 걸쳐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빈번하게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려와 요나라의 3차에 걸친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011년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찬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거란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도달하자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을 틈타 적을 크게 무찌릅니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희생을 치렀지만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다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소배압은 다음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해 퇴각하고 맙니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협공으로 인해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10만 대군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2천여명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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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소현세자는 왜 독살당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왕 인조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인조의 치욕스런 굴욕이 있었기에 소현세자가 반청운동에 선봉에 설 것으로 믿었던 인조와 신하들 백성들의 바램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포교를 위해 심양에 머물러있던 천주교 신부 아담 샬을 통해 또다른 서양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실리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는 인조 등에게 의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청 황실과의 교분을 통해 인조를 왕에서 내리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한 것으로 오해하여 9여년의 시간을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하자 마자 병석에 있다가 죽게되니까 독살을 당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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