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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귀걸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97년 발발한 정유재란은 조선과 일본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무덤을 남겼습니다. 일본 쿄토에는 일명 귀무덤으로 불리는 코무덤이 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 정면에 있는데 쿄토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와 묻은 무덤입니다. 원래는 코무덤인데 잔인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왜군들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 군인 뿐만아니라 일반인들의 코도 소금에 절여 보냈고 히데요시는 코 영수증까지 써주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 12만 6천명의 코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을 전리품으로 생각한 일본인들의 잔인함과 조선인들의 원혼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진도군 고군면 왜덕산에는 명랑대첩 당시 사망한 일본 수군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인근 울돌목에서 대패해 숨진 왜군 100여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죽어서나마 고향 일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동남향 해변 양지바른 산자락에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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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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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의 창업군주로 천태조나 천명제는 잘 사용하지 않고 누르하치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누르하치는 1583년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습니다. 그러자 명나라가 해서여진하고만 무역을 하겠다고 금수조치를 내립니다. 반기를 든 그는 만주를 통합하고 명나라를 처들어갔다가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패한 뒤 사망하였습니다. 누르하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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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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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종 천리장성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쌓은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동북 변경의 여진족 서북 변경의 거란족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건국 이래 고려는 변경의 방비를 위해 관방(변방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 시설을 쌓았는데 1014년(현종 5)에서 1030년(현종 21)에는 동북 서북 양면 요새 여러 곳에 성곽을 쌓았습니다. 압록강에서 원산만까지 1천리에 달한다고 하여 천리장성으로 불리며 고려장성이라고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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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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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 때 개경 환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인종 때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일을 말합니다. 1270년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신하들은 개경 환도를 주장합니다. 개경 환도는 몽골에 항복을 의미하며 이후 고려는 원의 속국이 되어 정치적으로 간섭을 받게 됩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저항했던 삼별초의 난도 진압되고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군사를 보내야 했으며 철령 이북 영토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원나라에 내주었고 2성 6부를 첨의부 4사로 바꾸는 등 정치적 간섭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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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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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근왕운동은 무엇인지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85년 베트남의 실권자 똔텃뚜옛이 어린 황제 함기를 데리고 궁중을 탈출하여 광찌지방의 산간지대에 거점을 확보하고 근왕령을 반포하여 의군을 조직하고 프랑스군대와 싸운 독립운동입니다. 1883년과 1884년 두 차례 프랑스와 맺은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더욱이 1885년 청불전쟁의 승리로 중국의 영향력이 없어지자 프람스의 정부에 대한 간섭이 노골화되었습니다. 이에 당시 전국의 문신들이 대불전쟁에 나설 것을 호소한 황제의 근왕령에 호응하여 지방의 학자와 지주들이 각지에서 의군을 일으키게 됩니다. 프랑스측은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는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무위신호의 조서를 발표하여 황제 함기의 망명조정을 불법화하고 동조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한 반면 투항하는 문신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항복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1988년 11월 함기가 산지 소수민족의 밀고로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되자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써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인 판딘풍과 호앙호아탐은 그후에도 장기간 프랑스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들이 계속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우수한 조직력 무기의 근대화 및 농민들과 밀착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19세기 한국의 우정척사운동과 맥을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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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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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이 일어난 당시 상황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와 거란의 요나라는 993년 1010년 1018년(1019년) 세 차려에 걸쳐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빈번하게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려와 요나라의 3차에 걸친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011년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찬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거란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도달하자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을 틈타 적을 크게 무찌릅니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희생을 치렀지만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다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소배압은 다음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해 퇴각하고 맙니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협공으로 인해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10만 대군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2천여명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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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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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소현세자는 왜 독살당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왕 인조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인조의 치욕스런 굴욕이 있었기에 소현세자가 반청운동에 선봉에 설 것으로 믿었던 인조와 신하들 백성들의 바램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포교를 위해 심양에 머물러있던 천주교 신부 아담 샬을 통해 또다른 서양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실리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는 인조 등에게 의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청 황실과의 교분을 통해 인조를 왕에서 내리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한 것으로 오해하여 9여년의 시간을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하자 마자 병석에 있다가 죽게되니까 독살을 당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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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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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삼전도의 굴욕이란 어떤것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 인조는 강화도로 미처 도피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청군들은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공격해왔으며 삼남직방의 지원군들은 남한산성으로 오는 과정에서 전멸을 당하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버티다가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고 강화도로 피신한 왕실가족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삼전도 굴욕이라고 하는데 3번 무릎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예법입니다. 조선의 왕이 오랑캐인 여진족 앞에서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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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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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병자호란은 어떤 전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침입했던 후금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조선의 친명배금 정책)로 1636년 청 태종이 직접 거병하여 조선에 침입합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도 없어서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고 청군은 거칠 것 없이 우리강산을 유린하였습니다. 후방에서 거병한 병사들은 청군에게 어이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실가족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인조는 스스로 삼전도로 나와 청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청황제는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볼모로 청나라로 끌고갔습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균형을 잡고 있었으나 인조 때 이 균형추가 깨지면서 엄청난 난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지키고자 한 세력과 실리를 추구하자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으로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빈 강씨는 귀인 조소용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사사당했으며 세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당했습니다. 첫째는 장독으로 죽고 둘째는 병사하였으며 셋째만 살아 효종 때 유배에서 풀려납니다. 인조는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가 북벌론으로 유명한 효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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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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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대표적인 나라들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25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전쟁이 치뤄졌습니다. 남북대결에서 남한측은 유엔 연합군의 참전으로 적극적 방어가 이뤄졌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등 16개국과 의로지원국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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