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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배분 비율이 얼마인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저작권료는 여러 분야 나눠서 분배가 됩니다. 단순히 가수가 타 가수의 노래를 방송에서 불렀다고 이익금이 분배되진 안습니다, 하지만 그 곡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발매가 된다면 이익금이 분배가 됩니다저작권분배 비율은 아래와 같습니다유통사 : 약 40%(음악 플랫폼+ 음원 대리 중개업자)음반제작사 : 약 44%저작자 : 약 10%(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 작곡4 : 작사4 : 편곡 2 비율)실연자 : 약 6%(가수, 연주자)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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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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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증을 해주나요?그리고 그 기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해외에서 자격증 공화국이란 별칭을 가진 우리나라인데 질문자께서도 자격증에 대한 질문을 하신것으로 보입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수가 되기 위한 자격증은 없습니다한때 가수 김건모 국민가수인지 아닌지 를 kbs 에서 전화투표했던적이 있는걸 아시나요? 이런 인정과 인식을 위해 과거부터 자격에 대한 논의는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위의 전화투표는 국민가수가 맞다 였지만 아니다 란 의견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가수 이지만 국민가수 이다 아니다 에 대한 논의가 있는것 처럼 가수 란 것은 자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결정될수도 없습니다.여타의 자격증은 국가나 공인된 단체들에서 자격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시험을 쳐서 일정 점수를 넘을 경우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가수가 시험을 치나요? 물론 가수협회에 가입하기 위한 자격은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서태지도 가수협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수협회 회원만 가수 이다 라는건 틀린 명제 입니다.결론적으로 가수 자격증은 없고 그에 대한 승인을 해주는 국가기관은 없습니다.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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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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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7대 불가사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낸 가장 기적적인 건축물 일곱 가지를 말합니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록들이 작성되어 왔습니다. 가장 유명한 목록은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해 낸 세계의 불가사의 입니다. 다만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세계"라는 말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헬레니즘 문명권을 뜻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면 됩니다. 이 명칭은 기원전 약 3세기를 전후로 하여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보고 들어서 알던, 주변의 발달된 문명 국가들이 이룩한 웅대한 건축 및 예술 작품을 말합니다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지은 시에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일곱 개의 이른바 "기적물"은 시대에 혹은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퀴로스의 궁전, 바빌론의 바벨탑이 경우에 따라서 7대 기적물에 손꼽히기도 합니다. 원래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대신 바빌론 성벽(이슈타르의 문)이 들어갔지만, 6세기에 교체되었습니다. 다음 목록은 전형적으로 꼽히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입니다.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피라미드.대피라미드 (→ 이집트 문명)바빌론의 공중 정원 (→ 바빌론)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에페소스)마우솔로스의 영묘 (→ 할리카르나소스)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올림피아)로도스의 거상 (→ 로도스)이들 중 대피라미드가 가장 오래 된 건조물인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건재합니다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일부 작가들은 중세에 지어진 불가사의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목록의 건축물들 중 상당수는 중세에 지어진 것이 아니지만, 중세의 불가사의로 잘 알려진 것들입니다전형적인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스톤헨지콜로세움콤 엘 쇼카파의 카타콤베 (Catacombs of Kom el Shoqafa)만리장성영곡탑(靈谷塔)하기야 소피아피사의 사탑이것들 외에 아래와 같은 것이 들어간다.타지마할카이로 요새엘리 성당클루니 수도원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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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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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스페인 내전때 반군을 지원해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1차대전 전에 발발했던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반군을 지원했던 이유는 반군들이 그들과 같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였기에 파시즘, 공산주의의 확산을 위해서 그들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습니다.그때문에 반군이 승리하여 수십년간 프랑코의 독재가 이어졌죠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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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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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은 누가 편찬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님께서 편찬하신 책 입니다.『농사직설』은 조선 세종대에 우리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농법을 모아 편찬한 책입니다. 세종은 정초, 변효문 등에게 명하여 기존 농법 중에서 우리 땅에 적절하고 중요한 방법만을 모아 책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곡식 종자의 선택과 저장, 논밭갈이, 벼·기장·조·수수·콩·팥·보리·밀 등 곡식의 재배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농사직설』은 조선 전기의 농업경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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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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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때 만들어진 측우기의 용도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측우기는 말 그대로 비의양을 측정하는 우량계 라 할수 있습니다.강우량을 측정하여 비가 얼마나 왔는지 확인하는 장치 입니다.1440년 세종22년 때 전후하여 발명되어 20세기 초 일제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될때까지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우량 관측기구로 사용되었습니다.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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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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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스페인 군부는 왜 내전을 일으켰는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치적으로 좌우의 대결이 심하였던 시기에 투표의 결과로 좌파와 우파간의 내전이 발발했던 것 입니다.자료를 찾아보니 주스페인 대한민국 대사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어 찾아 붙여드립니다. 1931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왕정이 폐지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여성이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1933년 선거에서는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1936년 선거에서는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다시 승리하여 마누엘 아시냐 총리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좌파 정권의 탄생과 개혁에 불안을 느낀 군부가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1936~1939)이 발발하였다.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도덕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반면 국민전선은 잘 훈련된 군대, 수적인 우세 그리고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https://overseas.mofa.go.kr/es-ko/brd/m_8096/view.do?seq=674915&srchFr=&amp%3BsrchTo=&amp%3BsrchWord=&amp%3BsrchTp=&amp%3Bmulti_itm_seq=0&amp%3Bitm_seq_1=0&amp%3Bitm_seq_2=0&amp%3Bcompany_cd=&amp%3Bcompany_nm= 원문링크>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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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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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전쟁을 하려면 보급은 얼마나 인원이 필요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미있는 질문 감사합니다.중세시대의 보급과 관련하여 찾아낸 자료를 알려드리겠습니다.-군대의 보급-산업혁명 이전의 보급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1. 약탈형 보급2. 민간업자 (상인, 중간업자 등)의 보급3. 징발형 보급이 세가지 보급 형태 중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통제가 원할한 형태의 국가는 주로 세 번째 형태 (징발형)의 보급이 주를 이루고, 비교적 병력 규모가 적고, 중앙집권화의 진행이 덜 된 국가들은 첫 번째와 두 번 째 형태의 보급이 주를 이룹니다. 두 번째 형태인 민간업자를 통한 보급은 중앙집권 국가 든 아니던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의 보급형 이기도 합니다. 현대 국가에서도 군수품의 많은 부분을 민간업체 (혹은 군수업체)에서 공급하는 형태를 보입니다.어쨋거나, 30년 전쟁 이전(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유럽군의 보급은 주로 약탈과 민간업자의 보급에 의존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약탈에 의존하는 보급은 군대가 지나가는 지역이 초토화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나, 군 사령관의 입장에서 보면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없을 뿐더러, 짭짭할 부수익(약탈품)으로 군대운용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약탈형 보급의 또 다른 약점이라면, 약탈에 의지하는 군대는 대규모의 병력운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군대가 한 지역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민간업자가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방식은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널리 활용된 방식인데 이 경우 대게 상인들이 군대에 필요한 식량이나 무기 등을 타 지방이나 주위에서 구입한 다음, 군대에 판매했습니다. 대규모 군대 (수만명 급의) 에 상인을 통해 식량을 보급할 경우에는 대게 국왕이 전쟁기간 (혹은 전시 초기)에 모든 식량의 판매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내리고, 상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상인들이 공급하는 방식은 국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급체계의 유지에 필요한 관료조직을 운용하지 않아도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의 동원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 만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운용하기에는 힘들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징발을 통한 보급방식은 중세유럽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은 방법이나 근대유럽 및 중, 근대 중국 에서 많이 쓰인 방식입니다. 이 경우 국가가 방대한 양의 보급품을 징발할 수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의 유지, 보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효율적인 징발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방대한 규모의 관료제도가 필요하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징발제도는 보통 전쟁터에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식량을 모은다음 지방관의 관할 하에 보급품을 군대로 보냈습니다. 중세 영국의 경우 각 주를 담당하는 주장관이 그 지역에 할당된 보급품을 전쟁터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임무를 총괄하는 임무는 주로 학문이 뛰어난 고위 성직자들이 맞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근대유럽에서 이 보급품을 징발하는 사람들은 각 지역의 행정관들이 총괄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왕의 재무장관 (혹은 군 보급의 책임자)이 A 라는 지역에 3000석의 식량을 B 지역까지 집결시키라고 했다고 하면, A 지역의 행정관은 3000석의 식량을 책임지고 B 지역까지 운반했습니다. <https://m.cafe.daum.net/Ritter/1g22/10 원본 링크> 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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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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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으로 갔었던 조선통신사 2명의 말은 왜 달랐나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료를 찾아보니 같이 일본을 다녀왔음에도 다른 보고를 했던 이유는 둘 사이의 관계 때문 이었습니다.병화는 있을 것이다 라고 한 황윤길과 병화는 없다고 한 김성일.똑같이 일본을 다녀왔고 일본의 정황을 정찰하고 왔는데 전혀 다른 보고를 한 것이다.도대체 왜?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황윤길이 겁에 질려 비굴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분노에 황윤길과 다른 보고를 했다고 전한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성일은 국가 중대사에 개인적 감정을 개입한 꼴이 된다.그정도 졸장부 였을까?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출장 내용이다선조 23년 4월 29일 통신사 일행이 다대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에 5월 4일 도착하였다.당시 통신사 관련 기록들을 보면 황윤길과 김성일은 매사에 충돌한다.김성일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써의 당당함을 유지하려 한 반면 황윤길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애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부분에서 둘은 충돌한 것이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학문 /
역사
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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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가 설렁탕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패스트푸드는 롯데리아 라고 생각합니다.1979년 10월 25일 소공동에 롯데리아가 열린 날이 보통 우리나라에 최초로 패스트푸드가 시작된 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설렁탕의 경우는 영어에서 정의하는 패스트푸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감사합니다:)
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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