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 있었다는 순장 풍습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순장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권력자가 죽어 무덤에 묻힐 때, 그 사람에게 의지하던 사람들도 함께 죽어서 묻히는 걸 말합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 관습은 권력이 집중되고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3세기 후반 금관가야에서 처음 등장했고, 5세기에는 아라가야, 대가야, 비화가야, 신라 등 중앙과 지방으로 확산되어 다양한 형태로 번성하다가 6세기 중엽에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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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때 귀족남성들은 왜 스타킹을 신었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총이 발달함으로 인해서 갑옷이 쉽게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갑옷은 필요없고, 다리는 보호하고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흰색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남성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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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관하여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칼 융은 인생의 목표가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어릴 때는 사회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페르소나(가면)를 쓰고 때로는 남성성(아니마)과 여성성(아니무스)을 보여줘야 합니다.칼 융은 어렸을 때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년이 되어야 비로소 자아실현(개성화)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의식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칼 융은 페르소나(가면) 뒤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심리적, 정신적으로 우리 자신의 양면성(남성적: 아니마/여성적: 아니무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아니마를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며,여성은 자신 안에 있는 아니무스를 인식하고 이해해야 합니다.그래야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아마도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종교에 대한 태도였을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유아적이고 집단적인 신경증으로 본 반면, 융은 종교를 심리 치료를 위한 훌륭한 상징 체계로 보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신을 사람들이 유아기 때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의 투영인 환상으로 보았지만 융은 신의 이미지를 인간 정신의 온전한 원형으로 보았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작용에 초점을 맞춘 반면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동일한 정신 현상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프로이트의 렌즈는 하나였고 융의 렌즈는 두 개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입장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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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이 최초로 만난 시점이 어딘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43년 페르난 멘데스 핀토를 포함한 세 명의 포르투갈 상인이 우연히 일본과 교역한 최초의 서양인이었습니다. 핀토와 다른 상인들은 타네가 섬(종자도)에 상륙하여 현지인들에게 총기를 소개했습니다. 이 일화과 동서양의 처음만난 시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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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는 어떤 내용인가여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파우스트>는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그의 핵심 사상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자아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물질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정한 인간성'을 추구한 괴테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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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분야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시나리오 만들기(검토)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책에서는 '시나리오는 이야기의 흐름, 장면, 등장인물 등을 글로 쓴 계획서'라고 설명합니다.원작자에게 상담을 신청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대본(대화 대본)입니다. 그리고 오케이 사인을 받으면2. 그림 콘티 검토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작업 방법, 클라이맥스 표현 방법, 카메라 앵글, 글씨를 어느 정도 다듬어야 하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이때 우리가 흔히 보는 그림 콘티북을 콘티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이때 원작자, 감독, 프로듀서도 함께 모입니다.3. 컷 브레이크그림 콘티를 장면으로 나누고 원화 작가에게 컷을 할당하는 과정입니다.감독과 회의를 통해 장면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이며, 이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콜시트(6가지 원칙을 정리한 표)를 만듭니다.이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액션 장면을 결정합니다.3-1. 캐릭터 디자인 및 설정 4. 글쓰기-그림 그리기 회의대본, 그림 내용, 설정 등을 논의하기 위해 작화 감독과 원화가가 만나는 회의입니다.이때 주로 연기, 레이아웃(카메라 앵글), 러닝타임, 감정 묘사 등에 대해 논의하며 시작 일정이 촉박한 제작 일정을 계획합니다.7. 레이아웃 제작 - 리콜원화가들이 여러 차례의 회의와 그림 콘텐츠 등을 모아 레이아웃을 만들고, 프로덕션 매니저가 이를 취합하여 다음 사항을 확인합니다.카메라 앵글, 배경 아트워크 디자인, 캐릭터 러프, 러닝타임, 광원 등을 확인합니다.7-1. 레이아웃 제작 확인제작 관리자는 새로 업로드된 레이아웃 정보를 관리 시트에 기록하고 컷 내용을 확인합니다.7-2. 레이아웃 방향 확인연출자는 연출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하는지,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지 확인합니다. 이때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여 원화 작가에게 다시 전달합니다.7-3. 레이아웃 구성 확인아트 디렉터는 위와 같이 아트워크가 어느 정도 작업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수정 포인트가 있으면 수정하여 원화 작가에게 전달합니다.7-4. 레이아웃 배경팀에 원본 전달하기카메라 앵글, 배경 도안, 캐릭터 러프, 러닝타임, 광원 등을 전달합니다.7-5. 레이아웃 반환사본을 만들어 원본 아티스트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수령할지 확인합니다.8. 원본 아트웍 복구원화 작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레이아웃을 바탕으로 원화를 그렸습니다.원화 작가에게 원화를 회수하러 간다고 말한 후 다음 회수 날짜를 요청해야 합니다. 원화, 스토리, 레이아웃도 두 번째 스튜디오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이 책이 나온 후에도 원화 한 장을 얻으려면 몇 시간을 운전해야 합니다.8-1. 원본 아트웍 확인원화 작가, 프로덕션, 작화 감독자가 원화를 수거하여 확인하면 바로 컬러 작업이 시작됩니다.9. 컬러 회의애니메이션 배경 및 채색 회의를 진행합니다. 이때는 아트 디렉터, 아트팀, 감독, 그리고 어느 정도 슈퍼바이징을 할 수 있는 분들이 오십니다.각 컷의 시간대(아침, 점심, 저녁), 카메라 앵글(원근, 광각), 카메라 워크(움직임)에 대해 논의합니다.이때 배경이 부족하거나 촬영감독이 연세가 많으신 분이면 애니메이터들이 설산에서처럼 옷을 입고 촬영하기도 합니다.10. 제작 (하청)컬러 회의가 끝나면 외주 업체에게 스토리를 보여주고 주문을 시작합니다. 이때 컷, 스토리지(셀지), 설정, 주의 사항 등을 알려주고 전표(상세 영수증과 비슷)를 줍니다.10-1. 동화 완성 - 확인동화 작업이 끝나면 관리표에 수거하여 체크하고, 부수는 1차로 전표 확인, 2차로 동화 검수 담당자가 확인합니다.이때 데생, 그림자, 콘티, 원화 등이 도안대로 제작되었는지, 삭번 등의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고 채색 작업을 시작합니다.11. 채색 가이드 만들기채색 회의에서 지정한 색상을 입력한 후 데드라인을 정했습니다.그리고 바로 채색을 시작합니다.11-2. 컬러링컬러링 가이드, 콜 시트, 캐디(캐릭터 설정), 데이터를 기본으로 하여 컬러링을 시작했습니다.11-3. 셀 검사색칠 가이드를 잘 따랐는지, 색칠하지 않고 떡을 먹지는 않았는지 셀을 점검합니다.11-4. 채색본 회수셀 검사를 통과한 색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단계로 이동합니다.12. 배경 불러오기(BG)주문이 접수되기 전에 생성된 배경을 불러옵니다. 이 역시 레이아웃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확인합니다.13. 촬영 회의촬영팀과 감독이 콘텐츠를 바탕으로 촬영 프로세스에 대해 논의합니다. 배경팀과 마찬가지로 촬영 중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가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14. 편집 시작최종 컷을 편집실로 보내고 사운드와 BGM을 추가하기 위한 타임시트를 전달합니다.15. 더빙 시작성우가 영화 더빙을 시작합니다. 라이브 더빙16.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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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여름에 얼음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시대 빙고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를 관장하던 관청을 빙고전(氷庫典)이라고 불렀습니다. 빙고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늦어도 6세기 전반에는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505년(지지왕 6) 11월에 왕명으로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6세기경에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고려 시대에도 이런 용도의 빙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그리고 경주 석빙고,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얼음을 얻기 위해 "빙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빙상은 겨울철에 얼어붙은 강이나 연못의 물을 얼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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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이 영국에서 영웅이지만 왜 인도에선 욕을 먹나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3년 인도의 벵골 기근. 전 세계에 평화를 촉구하고 영국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던 처칠이 최대 7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벵골 기근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이 뒤늦게 제기되었습니다.인도 출신의 미국 작가 마두스리 무커지는 2010년 출간한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일본이 미얀마를 점령하자 처칠은 일본이 미얀마를 통해 인도로 들어올 것을 우려해 인도에 대규모 쌀 공습을 명령해 기근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은 회의록과 같은 기록을 파기했지만 처칠의 말은 주변 사람들의 일기에 남아 있습니다.무커지는 자신의 책에서 "처칠은 비서에게 '폭격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인도인에 대해 험한 말을 많이 했다"고 주장합니다. 인도 총독이 식량 지원을 요청하자 처칠은 "왜 (당시 비폭력 단식 투쟁 중이던) 간디는 아직 죽지 않았느냐?"고 비꼬았습니다. 그는 인도 외무장관 리오 에머리에게 "나는 인도인이 싫다. 그들은 이상한 종교를 가진 이상한 민족입니다."라고 리오 에머리 인도 외무장관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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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틀어 보면, 고대 왕들은 왜 천문학과 역법을 중요시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의 권위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던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은 천문학과 역법, 농업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예전에는 농업에 중점을 두면서 천문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천문학은 천체의 움직임, 기후 변화,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을 연구하여 정치적 변화를 관찰하고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특히 왕은 자신이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문학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태조 왕건 때에는 고구려 천문도(평양 별자리)의 비문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열차분야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세종대왕 때는 천체의 움직임과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 간이 등의 천문 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의 시간 측정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천문학의 발달은 역법의 발달로 이어져 세종대왕은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칠정산》은 중국과 아라비아 역법을 바탕으로 한성을 기준으로 날짜와 계절의 변화를 계산하는 기법을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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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최초의 숙박업체의 역사에 대해서 긍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나라의 전통적 숙박시설은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였지만, 신라시대에는 ‘역(驛)’이라는 형태로, 고려시대에는 ‘역’·‘객사(客舍)’라는 형태로, 조선시대에는 ‘역’·‘원(院)’·‘여각(旅閣)’ 또는 ‘객주(客主)’라고 불리면서 발전해왔다.뿐만 아니라 장터를 내왕하는 장사꾼이나 나들이를 하는 서민을 위해 길가나 동네 어귀에서 술과 음식을 팔고 나그네를 유숙시키는 ‘주막’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초기 숙박업에 관한 사서(史書)의 기록을 보면, 신라 문무왕 때 차득공(車得公)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지방 이속(吏屬)의 집에서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문무왕조에 보이고 있어, 그 당시에 민박과 같은 형태의 숙박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숙박제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서방(西方)에 우역(郵驛)을 두고 소사(所司)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객주 및 여각들의 동업조직인 객주회 등이 구성되어 조합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고, 영국·프랑스 등 해외열강의 한국진출이 활발해지자 외국인의 숙박은 물론, 직접 외국상품을 거래하는 무역 등의 상업적 기능까지 담당하였다.이러한 시기에 서울에는 근대적 여관으로서 추원정(萩園亭) 등 4, 5개가 있었으며 대부분이 남산 기슭에 있었다. 1907년경 서울에 있던 1등급 여관은 성관(城館) 외 12개 소, 2등급 여관은 구주관(九州館) 외 12개 소, 3등급 여관은 구분여관(口分旅館) 외 9개 소 등 32개 소가 산재하고 있었다. 1930년 전후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경영되던 1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여관으로는 제일여관·남선여관(南鮮旅館) 등이 있었다.근대호텔로는 1888년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천의 대불(大拂)호텔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서울에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 호텔은 1902년 독일인 손탁(Sontag)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이며, 1909년에는 프랑스인의 소유였던 하남(何南)호텔이 역시 정동에 세워졌다. 1914년에 조선호텔이 생기고 1936년에는 서구식 형태의 반도호텔이 세워져, 우리 나라 호텔산업의 전환기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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