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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원시시대에는 몸을 이용하여 수를 세었습니다.손가락이나 몸의 일부를 수와 연관지어 물건의 개수를 세었는데 손과 눈, 코 입 귀 등의 신체를 몸의 상반신을 한바퀴 돌면서 수를 세다보면 무려 22까지 셀 수 있었다고 합니다.잉카 민족은 퀴푸 매듭을 이용하여 수를 세었습니다..당시 구하기 쉬웠던 양털이나 솜을 이용해 굵은 끈에 팬던트 줄이라 부르는 여러 가닥의 끈을 매달았습니다.그리고 거기에 보조줄을 매달아 매듭을 묶어 크기와 위치에 다라 숫자를 나타냈다고 해요.그리고 색줄을 사용해 각기 다른 물건의 수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인도-아라비아숫자는 일반적으로 아라비아숫자라고 불리는데 정작 이를 만든 것은 인도사람 입니다.그들은 유럽 사람들과 무역을 할 때 바로 이 숫자를 사용하였고 이를 본 유럽 사람들이 또 퍼트리고, 그렇게 이 숫자가 많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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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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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은 어느 절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찰"은 면적과 전통을 고려하면 통도사, 건물동 수와 현대적인 단지 구조에서는 구인사, 웅장한 법당은 약천사로 각각의 기준에 따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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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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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한글박물관은 몇개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총 3 군데 있습니다. 서울 국립한글박물관, 김해한글박물관, 충주 우리한글박물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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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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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중에 돼지고기 등 고기류를 안먹는 경우가 있던데, 무엇때문에 왜 고기를 안먹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이슬람교도들의 성전인 <코란>에는 여러가지 계율이 나와있는데, 식탁과 연관된 계율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가 직접적으로 인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가축과 연관된 내용에서도 '돼지고기'는 더럽다고 직접 언급되어 있습니다.이슬람교에서 돼지를 먹지않는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첫째, 돼지의 특성을 좀 살펴보면 그 이유들이 나오는 것 같다. 돼지는 인분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대식가이며 몸이 비대해 느릴 뿐 아니라, 발정기가 21일 주기로 돌아와 1년 내내 성욕이 강렬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불결한 동물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이슬람교나 유대교와는 잘 어울릴 수 없는 가축으로 애초부터 찍혀 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둘째, 중동지방처럼 덥고 건조한 지역에서는 돼지고기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이것을 잘못 먹으면 식중독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결한 음식물을 섭취하는 돼지는 질병에 감염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점도 같이 따라오는 이유입니다. 더구나 유목생활을 많이 해왔던 중동에서는 정착 가축인 '돼지'가 그들의 생태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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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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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유명한 대왕이었던 알렉산더는 왜 일찍 단명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독살이라든지, 뇌염이 원인이라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또는 정복 전쟁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한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폭음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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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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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것 같은데요 그런 분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하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려인은 일제시대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로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만주나 연해주에서 조선인이라 불리우기보다는 고려인이라 불리웠는데,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지금까지도 이들 조선인들을 공식적으로 그러니깐 러시아어로"까리스끼", 즉 한국어로는 "고려인"이라 부르는건데 이것을 또 한국에서도 러시아인들이 부르는방식을 그대로 채용하여 고려인이라 부르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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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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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길가메시의 서사는 고대 왕권의 정당성을 어떻게 세워주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태고의 작품이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엔 원시의 자연 상태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도시 문명 속에서 우쭐대며 살아가는 오만한 인간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와 은유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인 정치적 조직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일단 정치적으로 국가 조직에 배속된 인간은 웬만해선 정부를 벗어날 수가 없는데, 흡사 인위적 교배를 통해 가축화된 동물이 야생으로 회귀하기 힘든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화된 사회에 일단 편입되면 주민들은 합법적 공권력을 갖춘 정부의 감호 속에서 납세와 부역의 의무를 집니다. 일단 그렇게 정치적 삶에 익숙해진 인간은 무정부의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점에서 문명화된 삶(civilized life)은 곧 정치적 삶(political life)이고, 정치적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임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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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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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신화에서 사람의 희생 의식이 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아즈텍 의식의 가장 유명한 측면 중 하나는 희생이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우주를 균형 잡기 위해 인간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전사, 노예, 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희생 의식은 종종 사원 정상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제사장은 희생자의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고 신에게 바쳤습니다. 희생된 사람의 몸은 일반적으로 사원 밖에 묻히거나 강에 던져졌습니다.아즈텍인들의 희생 관행은 종종 야만적이거나 잔인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들에게는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그들은 인간 희생이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습니다.아즈텍 의식과 희생은 아즈텍 문명의 중요한 측면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들과의 관계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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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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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렌치가 독일사회주의랑 통일당 서기장이랑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고,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는 사임했습니다.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습니다.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결국 다음날인 12월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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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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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브리히트가 1960중반부터 서유럽국을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소련 지도자인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발터 울브리히트는 동독 지역에서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의 경제 계획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2차대전의 상흔이 여전히 깊게 남은 당시 동독의 경제 상황에서 공산주의로의 신속한 이행은 결코 쉽지않았다습니다. 공산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제일 먼저 큰 타격을 입게 될 자영농과 소상공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며,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는 서독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여기에 생필품 부족까지 겹쳤습니다. 생필품 부족을 타개하려면 경공업에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 매우 기초적인 상식이겠지만, 소련의 193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을 지도한 바 있던 스탈린은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여기에 냉전의 격화에 따른 군비 경쟁까지 겹치면서 동독은 나머지 경제적인 여력조차 군수산업에 탈탈 털어 넣어야만 했습니다. 일단 수치상으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긴는 했지만 중공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면서 내수를 희생시킨 대가로 전후 5년이 넘어서도 생필품은 부족했고 실질 생활수준은 서독에게 심각하게 뒤쳐지게 되었기에 동독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 갑니다. 당시 동독 사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발전량이 터무니 없이 모자라서 저녁만 되면 공장을 비롯한 모든 도시가 암흑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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