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크렌치가 독일사회주의랑 통일당 서기장이랑
국가평의회 회의장이랑 국가 안보위원회 의장을 겸하였는데..라이프치히에서30만 군중들이 크렌치왜이리많이하냐 반대하고 동독인들이 동독체제자체 다 뜯어고치고자??근본개혁하자해서 개혁이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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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습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고,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
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는 사임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
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음날인 12월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