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부 잘하는사람 답변좀 해주세요ㅠㅠ
안녕하세요.진흥왕 순수비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차지했다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전성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한강 유역이 가지는 의미는중국과의 수월한 교류로 선진 문물에 대해 쉽게 받아들임넓은 평야지대를 점령하게 되어 농업적으로도 많은 도움군사적 요충지(한반도의 한가운대)이러한 이유로 한강유역을 차지했다는건 가장 최전성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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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의상은 한복인데 중국의 전통의상이라고 자꾸 하는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중국이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자신들의 의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동북공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역사왜곡 정책 중 하나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본인의 역사인 양 바꾸려고 하는 시도입니다.중국이 이렇게 역사왜곡을 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훔치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과, 한류의 문화적 가치를 빼앗아 세계무대에 중국이 위대하다는 식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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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고조선 부터 시작인데 고조선때 단군할아버지가 중국사람이엇나여?
안녕하세요.단군왕검이 중국 사람이나는 의견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동/서/남/북의 다른나라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공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동북공정입니다.단군왕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국의 "삼국유사"에서 시작하였으며, 이미 그 안에서 한국 역사의 시조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에도 단군왕검에서 부터 이어저온 역사를 대한민국의 뿌리로 지칭하고 있기에, 단군왕검이 중국사람이라는 말은 허무맹랑한 말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고조선의 위치가 지금의 만주 지역이라 중국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후 만주와 요동지역은 한국의 역사 국가 중 하나였던 부여와 고구려도 점령했던 지역이기때문에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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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표현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나요?
안녕하세요.원래는 이솝우화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옛날 어느 부잣집에 하인이 몇 명 있었는데 날이 밝을 때마다 일어나 일을 해야 하는 게 귀찮고 싫어서 새벽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함께 연구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관찰한 결과 "닭이 울면 새벽이 온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집에 있던 닭이란 닭의 모가지를 전부 비틀어 놓고 잤다. 하지만 당연히 어김없이 동이 텄고 결국 닭들을 다 죽인 것 때문에 크게 혼이 난 건 물론, 노인이라서 잠이 적은 주인이 새벽 아무때나 깨워대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고생하게 되었다고 한다.원래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을 빗대어 말하는 말이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사용함으로써 순리는 거스르지 못한다는 의미로 변경되었습니다.197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의원직에 제명되면서 했던 말로 알려져 있고, 당시에는 그럼에도 민주화의 대의는 이루어 질 것이다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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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라는 동물이 실제로 존재했었나요??
안녕하세요.드래곤은 대표적인 상상속 동물입니다.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도, 당시 상상에 있던 영물을 묘사하면서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대표적으로 서양의 드래곤은 손(앞발)과 다리가 있고, 그외에 날개가 또 있습니다. 조류를 보면 손(앞발)이 날개가 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서양의 드래곤은 발이 6개 달려 있어야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서양의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으며, 상상의 동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동양의 드래곤도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속의 동물이라고 보는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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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소작농이 많았던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소작농이 많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에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왜란과 호란으로 인하여 조선의 많은 토지가 황폐화 되었으며, 특히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던 자작농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하여 자연스럽게 소작농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큰 전란 이후에 계속되는 흉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한 자작농들이 세금을 내기 위하여 소작농이 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이후 대동법이 시행되었지만, 오히려 소작농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땅을 가진 지주가 세금을 내야 하는데, 이러한 세금을 소작농에게 물리게 되면서 지주들만 배불리고 소작농만 부담을 지게 되는 악순환이 됩니다. 또한 전쟁 이후 군역 대신 내는 세금인 군포제가 강화되면서 이에 부담을 느낀 자영농들이 소작농으로 들어가는 일도 일어나게 됩니다.이렇게 자영농들이 몰락하는 대신 지주들은 계속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 넓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흔히 말하는 대지주가 되어 수많은 소작농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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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사화의 발생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이야기 해주신 갑오사화가 혹시 갑오개혁인지 먼저 문의드립니다.조선의 4대 사화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입니다. 김홍집 내각과 연결된 갑오년의 사건은 갑오개혁이라 생각되어 갑오개혁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갑오개혁은 조선 말기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 진행하였던 근대화 개혁으로, 김홍집 내각이 주도하여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하여 민심이 좋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왕권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 발전도 많이 뒤쳐진 상태여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조선에 외교적으로 많은 압박을 가하였고, 동시에 조선의 근대화를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을 더 높이기 위한 근대화 요구라고 보시면 됩니다.)1차 개혁은 일본의 영향 아래 김홍집 내각이 군국기무처라는 기관이 주관하여 개혁을 진행하였고, 2차 개혁은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내각이 주도하여 시작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에는 친일파 세력의 내각이 주도하여 진행하였습니다.주요 내용으로는 과거제 폐지, 내각제 설립, 신분제 폐지, 조세의 금납화, 은본위 화폐제도 시행 등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개혁을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개입으로 진행된 개혁이기 때문에 민심에 반감이 컸고, 특히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개혁이었습니다. 또한 너무 급하게 진행한 개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전체적인 평가로는 근대화로 가기 위하여 구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제도를 진행함으로써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일본에 의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율성과 정당성이 많이 부족하고, 아관파천 이후 개혁이 중단되어 성공시키지 못한 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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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유럽 국가 중 왜 유독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대항해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 시작은 당시 포르투갈 왕가의 지원이 큰 몫을 했습니다. 해양왕자로 불리었던 인판트 동 엔히크 왕자는 국가차원에서의 항해정책을 펼쳤고, 항해와 관련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또한 대양 항해에 유리한 캐러밸을 개발하기도 하였고, 인도로 가는 해양길을 확인하기 위해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개척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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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한 것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은 아시아로 통하는 해상 루트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당시 유럽은 인도로 가는 바닷길에 대해서 아예 알지 못했고, 오직 오스만제국을 통해서만 교역이 가능했습니다. 이에 포르투갈에서는 인도로 갈 수 있는 바닷길이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했고, 디아스의 항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폭풍우를 만나 아프리카 남단으로 표류하였고, 여기서 동쪽으로 가도 육지가 나오지 않자 본인들이 아프리카 남쪽을 돌았다는걸 알게 됩니다. 돌아오는길에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이 발견으로 인도로 가는 해안길이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인도까지 가지 않은 이유는 장시간 표류로 물자가 없어 죽을 위기이기도 하였고, 가능성을 위하여 시작한 탐사였기 때문에 희망봉 발견까지만 진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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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임금의 명을 어떻게 빨리 전달하고 전국에 알려주었을까요?
안녕하세요.과거 왕의 명을 직접적으로 전했던 방법은 파발이 있습니다. 파발로 전해지는 왕의 칙령을 빠르게 전파하기 위해, 말을 바로 바꿔탈 수 있는 역참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방까지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직접적이 아닌 전시-비상상황 등을 알리는 방법으로는 봉화가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연기나 불꽃으로 현재 상황을 알렸으며, 파발이 도착하기 전 먼저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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