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4대왕 광종은 어떻게 왕권을 강화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광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많이 알려진 것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의 실시 입니다.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면천시켜 주는 제도였는데, 겉으로는 후삼국-고려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신분제도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노비라는 것 자체가 호족들의 노동력이면서 군사력이기 때문에 노비안검법으로 면천된 노비만큼 호족의 힘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또한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한 왕이었는데, 광종 이전에는 조정 관료를 선발할 때 추천으로 관리를 선발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호족의 자제들이나 주변인들이 관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종은 후주(중국의 나라 중 하나) 출신의 쌍기를 귀화시키고, 그를 관리로 임명하여 당시 후주의 과거제를 본따 고려에도 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호족들끼리 해먹던 관직을 평등하게 선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외에도 독자적인 연호 사용(황제국으로 칭함), 관복제도 개편 등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실시 할 수 있었던 건 광종이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던 이유도 있습니다. 숙청+제도의 변화로 왕권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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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이데이, 빼빼로데이 등의 유래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요즘에 14일 기념일이 참 많은데, 기원이 있는 기념일은 발렌타인데이가 가장 유명합니다. 발렌타인데이는 2월 14일로,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이었던 발렌티누스 사제의 축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원래는 연인들을을 위한 날로, 3세기 경 로마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기독교 사제인 발렌티누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몰래 결혼을 시켜주었고, 이게 들통이 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연인의 사랑을 위해 순교한 발렌티누스를 기리며 발렌타인 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연인끼리 서로 꽃이나 초콜렛 등을 주고 받는 날이었으나, 20세기 일본의 제과회사에서 마케팅 목적으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로 홍보하게 되었고, 이게 우리나라에도 퍼지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렛을 주는 날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이외의 유명한 기념일인 화이트 데이, 로즈데이, 빼빼로데이 등은 모두 마케팅 목적으로 나타난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화이트 데이는 남자->여자로 주는 초콜렛을 여자->남자로 주는 사탕으로 바뀐 마케팅이었고, 빼빼로 데이도 11월 11일인 "1"의 모양이 빼빼로와 비슷하다고 하여 우리나라 제과 업체에서 만든 기념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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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왜 곰탕이 유명한건가요??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나주곰탕이 유명해진 이유는 나주가 호남지역의 중요 거점이였기 때문입니다.전라도에서 전라는 전주의 "전"자와 나주의 "나"를 합쳐서 전라도라 불리었습니다. 그만큼 나주는 조선시대 중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호남평야에서 나는 풍족한 농/축산물을 한양으로 옮기기 위한 영산포의 항구 근처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수많은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모이는 도시가 됩니다. 나주는 다른 지역보다 특히 식재료 수급이 수월하였고, 당시 도축업도 많이 발달한 상태라 소고기를 넣고 끓인 곰탕이 많이 유행하게 됩니다. 곰탕 자체가 조선시대에는 상당한 고급 음식이었으나, 발달한 도시인 나주에서는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나주곰탕"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명칭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나주에는 커다란 통조림 공장이 위치하고 있었고, 이때 통조림 제조 이후에 남은 잡고기들이 당시 시장 상인들에게 싼 가격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이 고기들을 한데 모아 고아 먹는 곰탕 음식점이 자연스럽게 나주에 많이 모이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게 됩니다. 이후 한 식당에서 "나주곰탕"이라는 명칭 자체를 상표로 등록함으로써 나주곰탕이 유명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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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샤머니즘은 "샤먼"이라는 무당을 믿는 것으로, 통구스만주어로 샤먼은 '아는 사람'이라는 입니다. 원시 신앙은 당시 과학의 발전도가 많이 낮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신이나 귀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즉 무당이 신이나 영혼의 대리인으로 자리잡은게 샤머니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샤먼은 당시에 환각증상이 있는 약재나 흥분제, 아니면 음악이나 춤과 같은 행위로 신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졌기에, 원시 시대에 샤먼의 역할과 영향력은 족장 수준으로 높았습니다. 일부 원시 사회에서는 지도자와 샤먼이 동일한 제정일치 사회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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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숫자 5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중국에서 숫자 5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용을 뜻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는 아닙니다.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는 8과 9로, 8은 부자/ 9 는 장생을 뜻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89는 "오래 잘번다"라고 하여 매우 좋아하는 숫자입니다.춘추전국시대에 강력했던 제후들을 춘추 5패와 전국 7웅으로 불렀습니다. 5와 7의 숫자를 좋아하여 했던 건 아니었고, 당시 갈라져 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제후들의 숫자를 하다보니 춘추 5패와 전국 7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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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의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면서 가장 처음 배웠던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깊게 담론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문의주신 역사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자인 E.H.카에 의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즉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기록되어야 역사로 볼 수 있기에, 기록하는 역사가의 관점이 무조건적으로 반영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역사 서술에서 모든것을 빼고 객관적인 기록만 적어둘 순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의 관점이나 시대에 대한 통찰 없이 단순 기록으로써는 역사로 보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결국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현재를 통찰하고, 더욱 진보하기 위하여 그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현재 역사가의 담론이 합쳐졌을때 비로소 역사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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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사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사출도는 부여의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초기 부여는 부족끼리의 연맹 국가였으며, 이때 당시 대표 부족이 4개 부족이 있었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리는 이 4부족이 중심이된 연맹체가 부여였습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는 모두 가축 이름입니다.) 이 부족들이 지방에 눌러 앉게 되면서 행정구역화 되었고, 수도를 중심으로 4방향으로 뻗어나간다고 하여 사출도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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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세종의 권력을 위해서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태종은 3남이었던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후, 자신의 왕권으로 세종의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가장 첫번째로 한 것은 태종이 직접 한 선위 쇼였습니다. 본인의 왕권을 세자인 세종에게 물려준다는 선위 선언을 지속적으로 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반대하지 않는 신하는 자신, 또는 왕권에 대해여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해석하여 숙청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견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후 실제로 자신의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 선왕으로 사후까지 4년간 세종의 뒤에서 신하들을 견제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으로 유명했던 태종이 살아있는데, 세종의 왕권에 도전할 신하가 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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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우리나라 경제는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80년대에 우리나라가 잘 살았다고 하는건 그 당시 경제성장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성장률이 평균 10~12%정도가 되었기에, 80년대만 통틀어 본다면 전체적인 성장률은 지금과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는 평균 1~2%정도 성장하였으니, 약 10배정도 차이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직장인들의 임금도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올라갔고,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지하철과 도로, 도시들이 급격하게 개발되어 70년대와 80년대는 말도 안되게 발전하였다고 느껴졌을 것입니다.지금보다 잘 살았다라고 말하기에는 경제적인 총량으로 비교한다면 당연히 지금이 더 경제력의 총량은 높겠지만, 당시 성장률은 지금과는 다르게 빠르게 성장하였기에 체감으로 느껴지는 "전보다 훨씬 잘 살아졌다"는 느낌이 와닿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반찬으로 김치랑 나물만 먹다가 다음달에 고기반찬, 그 다음달엔 반찬이 10가지가 나오니 "아 우리 잘사는구나" 하고 느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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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통일을 한 후 고구려,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부분의 백제와 고구려 왕족은 당나라로 압송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일부 왕족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되었으나 그곳에서 인정을 받고 당나라의 관리로써 활동합니다. 그러면서 당나라의 백제땅 점령을 위한 장수로 임명되어 자신의 고향 영토에서 일어나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웅진도독부의 도독까지 임명됩니다.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간의 나당전쟁이 발발하고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점령하면서 당나라로 도망, 남은 여생은 당나라에서 보내게 됩니다.고구려의 왕족 중 한명이었던 안승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승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끝내 패배하고, 신라로 투항하게 됩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안승에게 금마저(지금의 익산쯤 됩니다.) 지역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를 왕으로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당시 왕이었던 문무왕의 조카딸과 혼인을 하였고 고구려 유민들이 어느정도 안정된 후 보덕국을 해체, 안승은 신라의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어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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