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에는 왜 왕위 쟁탈전이 그렇게 자주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신라는 계급사회로, 태어났을때부터 정해지는 품계인 골품제에 따라서 직급이 정해졌습니다. 왕은 원래 성골 출신만이 왕이 가능하였으며, 그 아래인 진골은 원칙적으로는 왕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골이 점점 없어지면서 점차 성골 출신 왕이 나오기 힘들어졌고, 성골 출신의 여왕까지 지난 이후에는 성골이 없어지다 시피 하여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습니다.성골은 매우 희박하였지만 진골은 상당히 많았기에, 이후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는 (나도 왕이 될 수 있겠다) 하는 풍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후기로 갈수록 왕권도 약해져갔기 때문에, 힘이 있는 다른 진골 출신 왕족이 왕의 자리를 찬탈하면서 왕위 쟁탈전이 계속 일어났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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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은 독립적 지위였다는데 후궁보다 위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이야기 해주신 것 처럼 세자빈은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궁의 경우 품계를 따지는데, 세자빈은 그런 품계를 따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내명부의 위치로 보면 세자빈이 후궁보다 높았습니다. 후궁은 왕의 첩이긴 하지만 정실이 아니었고, 조선시대 첩은 부인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자빈은 현왕이 승하하면 자연스럽게 왕비가 될 몸이었기에, 왕가에서 정실 부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명부의 승계로 본다면 왕비-세자빈-후궁-이외 세자가 아닌 왕자의 부인 순서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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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을 왜 전쟁 행위라고 주장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전쟁 상황에서 체포 또는 투항하게 되면 전쟁법에 따라서 포로로 인정이 됩니다. 포로의 경우 함부로 사형시키거나 형을 집행시킬 수 없이, 인도적인 절차에 따라서 우선 지켜줘야 하기에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주장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안중근 본인도 '대한 의군 참모중장'으로 소개를 하였기 때문에,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교전으로 보고 본인을 포로로써 대우해주길 요청하면서 독립전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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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우리나라도 해적이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물론 한반도 출신의 해적들도 존재하였습니다. 신라 시대 해상왕으로 유명했던 장보고는 당시 해적들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여 해상왕으로 불리었습니다. 여기에서만 봐도 한반도에 많은 해적들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고, 장보고의 세력 안에서도 해적 출신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고려시대 기록에서는 수적 또는 해도라 불리우는 무리가 있었고 상선을 약탈하거나 세금 운반선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어민이나 탈영병이 해적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흔히 알려진 왜구 만큼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규모 자체가 워낙에 작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자체가 반도 지형이고 한반도는 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기에 해금 정책이나 군현의 통제가 잘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적이 숨어서 활동하는 근거지를 만들기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경우 많은 섬이 있고, 전국시대에는 지방 영주들의 통치가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해적들이 성장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해적의 세력이 크기도 해서 이들을 소탕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채용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영주들도 많았기에 왜구가 성행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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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활은 작은 반면, 일본의 활은 엄청 크던데 기술력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기술력의 차이라기 보다는 원재료의 차이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습한 기후이기 때문에 접착제 사용이 쉽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무와 대나무를 활용한 복합궁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접착제를 활용하여 강성이나 탄성이 좋은 재료들을 혼합해 만드는 합성궁은 작은 크기라도 그 효능을 낼 수 있었는데 반해, 많은 재료를 활용하지 못한 복합궁은 장력을 끌어내기 위하여 그 크기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거리는 우리나라 국궁이랑 비교하였을 때 더 짧았고, 파괴력은 비슷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기술력은 당연히 합성궁이 더 좋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없던 건 아니었고, 기후에 맞춰서 발달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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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와 트로이에 있던 영웅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영화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장군 중 한명인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소설) <오디세이아>를 각색한 영화입니다. 즉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한 영화라고 보시면 됩니다.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당시 최고 미인이었던 헬레네 이야기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헬레네는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었기에, 수많은 구혼자들이 나타났고 이 중 누구를 선택하면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치열했다고 합니다. 이때 구혼자 중 한명이었던 오디세우스가 "구혼자가 결정되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이후에 헬레네에게 일이 생기면 모두가 나와서 도우자"라고 약속을 제의하였고, 이게 받아들여 지게 됩니다. (오디세우스 입장에서는 헬레네에게 선택받기 어려워보이니, 사촌인 페넬로페라도 데리고 가려고 계책을 짠 것 이었습니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라는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에게 결혼을 하게 됩니다.이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 하게 되고 이전의 약속으로 인하여 구혼자들과 동맹의 왕들이 힘을 합쳐 트로이를 공격, 이게 트로이 전쟁의 이유가 됩니다. 트로이 전쟁 종료 후 오디세우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가 난파되면서 일어나는 모험담이 바로 오디세이야의 이야기이고, 영화 오디세이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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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수리남은 실제있었던 일을 각색한 거라던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넷플릭스 드라마였던 수리남의 주인공은 전요한(황정민)과 강인구(하정우) 입니다. 수리남의 배경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로, 전요한의 모티브는 조봉행, 강인구의 모티브는 강신구씨 입니다.조봉행은 수리남으로 귀하한 한국인으로, 원래는 냉동창고 기사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사기 혐의로 수배되자 이전에 인연이 있어 8년정도 살았던 수리남으로 도망갔고, 거기로 귀화하여 수리남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후 불법 기름 유통으로 돈을 벌다가 규제로 판매가 어려워지자 마약 사업에 손을 대었고, 사업이 커져서 2005년에는 인터폴에 수배가 될 정도로 사업을 키웠다고 합니다. 드라마와 다른 점은 목사나 사이비 교주는 아니었고, 막 부자처럼 살지는 않고 1층짜리 집에서 혼자서 조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약 유통을 하는 사람인지 교민들도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처럼 현지에서 체포되진 않았고 강신구씨와 국정원의 작전으로 브라질로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이송되어 징역 10년에 벌금 1억원 형을 받게 됩니다. 이후 건강이 약화되어 형집행정지를 받았다가 조선대 병원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강신구씨는 수리남에서 다른 사업을 하던 사람으로, 조봉행 때문에 사업이 망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국정원이 협력 수사를 요청하였고, 드라마처럼 마약 브로커로 조봉행에게 접근하여 수사를 도와주게 됩니다. 이후 조봉행을 브라질로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성공하여 체포할 수 있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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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태국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한번도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대나무 외교라고 하는 외교 전략에 있었습니다. 태국은 어느 한곳에 묶이지 않는 독자 노선을 탔는데, 서구 열강 중 어느 한 곳에 얽메이지 않고 왔다갔다 중립 외교 정책을 펼였습니다. 이 모습이 대나무 처럼 흔들린다고 하여 대나무 외교라고 불립니다.단적인 예로 세계 1차 대전 당시에도 원래 태국 내 여론은 친독일 여론이 더 우세(독일이 철도도 놓아주고 했습니다.)하였으나 어디에도 참전하지 않고 있었고, 이후 전쟁 종반 연합국이 승기를 잡자 연합국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태국은 승전국의 입장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외교적으로 위상을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한쪽에 힘이 쌔진다 싶으면 다른쪽으로 붙는, 어떻게 보면 박쥐 같은 작전이긴 한데 당시의 약소국이었던 태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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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첨성대의 실제 역활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첨성대가 별과 계절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가 정론입니다. 그 외의 반론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이야기 하신 것 처럼 좁고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의견인데, 그 외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단순히 제사를 위한 건물이었다거나 선덕여왕을 신성시 시키기 위한 상징물이었다 등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많이 모자란 편입니다.오히려 별을 관측하려고 했다는 설이 더 받아들여 지는건 실제 기록에서도 첨성대를 "점성대"라고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의 "점" 이 점성술의 점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대의 점성술은 대부분 별을 보면서 시행하는 일이 많았기에, 별을 관측하기 위한 건물이었다에 더 무게가 실리는 기록입니다. 또한 첨성대 건축 이후 신라시대 천문 관측에 대한 기록이 많아졌다는 것도 정황 근거로 첨성대에서 별을 관측하였다는 학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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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탕평정책은 겱롸적으로 세도정치를 불러온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정조가 실시했던 탕평책은 결과로 보았을 때는 세도정치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래 정조의 탕평책의 목적은 왕권강화로, 자신이 신임한 외척 김조순과 함께 당파들의 힘을 약화 시킨 후 왕권을 강화시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인하여 강력해진 외척의 힘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파의 힘이 약해졌을 때 정조가 죽지 않고 외척 세력의 권한을 흡수하였다면 정조가 생각한 왕권 강화가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정조 사후 어린 순조는 외척을 견제할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를 막을 수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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