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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가 교활한 시지프스에 잡힌 계략이 뭔가요??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자신을 보복할 줄 사전에 알았다고 하네요. 따라서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정문에 도착하자 그를 쇠사슬로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로인해 저승사자가 묶여 죽는 사람이 없어 세사은 한동안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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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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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노예제도에 대한 역사가 궁금합니다
브라질에 처음 노예가 도착한 것은 1516년 포르투갈인들이 도착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사용한 것이 시작입니다. 원주민들을 종종 반데이라는 탐험대에 잡혀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당시 1200만명의 아프리카 노예 중 절반인 600만명 가량이 브라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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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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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의 머리에 항상 월계관이 있는 이유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이 다프네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폴론의 구애를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월계수로 변했다고 합니다. 비록 아폴론은 다프네를 단념할 수밖에 없지만 월계수를 자신의 성수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폴론은 왕관 대신 월계수를 엮은 관을 썼다고 합니다. 따라서 월계수는 아폴론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폴론의 성지 델포이 부근에서는 아폴론 신을 기념하는 파티아 제전이 4년에 한번씩 열렸는데, 아폴론이 음악과 시를 주관하는 신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음악 경연으로 진행되었으나 차츰 올림피아에서 행해진 종목들이 포함되어 경연의 우승자에게 아폴론의 상징인 월계관을 씌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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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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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국과수 비슷한 조사기관이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국가과학수사대와 같은 것은 없었으나 형조 소속의 '오작인'이 존재했습니다. 오작인은 범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법의학 전문가입니다. 오작인은 변사체를 매만지며 검시를 담당하는 오작인 혹은 오작사령이라 하였습니다.오작인은 법의학에 근거해 사인을 규명하였습니다. 시신의 상태와 상흔을 관찰하여 사건을 해결했으며, 식초, 삽주 뿌리 등 일상 속 과학 원리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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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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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어디어디에 세워졌나요?
척화비는 1871년(신미년)에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 거부 의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 주요 요지 200여곳에 세운 비석입니다. 비석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고 적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대부분 철거되거나 현재 30여개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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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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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누가 결정하나요?
조선시대 국왕의 시호, 묘호를 붙입니다. 시호, 묘호 모두 사후에 짓는 이름으로 묘호는 오직 임금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라는 시호는 개인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묘호와 시호는 후대 왕이나 관료들이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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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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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묘호가 어떤분은 종이고 어떤분은 조이고 어떤이는 군이 붙는데요. 이건 어떤 기준으로 이런 묘호를 만드나요?
국왕의 묘호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으로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지어집니다. '조'는 나라르 개국한 왕,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의 위기를 다시 세운 왕에게 붙입니다. 그는 '종'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선대 임금의 뜻을 이어간 왕입니다.그런데, '군'은 왕이 아닌 왕자의 신분을 말하며,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어 국왕의 신분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군으로 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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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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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고인돌이 많이 존재한다고하는데 다른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만 유독 많은 이유가 있나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거석 구조물입니다. 고인돌은 전세계적으로 고인돌이 갯수는 8만개 정도 존재하며 그 가운데 절반인 4만개가 한반도에 집중됩니다. 이렇게 한반도에 고인돌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는 돌이 많은 지형적 특성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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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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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조조와 원소는 왜 사이가 틀어졌나요?
원소는 반탁동맹의 맹주였으나 조조는 한낮 원소계 군벌로 분류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 이후 동탁이 임명한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반면 조조는 이런 헌제를 보호하고 황실의 권위를 되살리려는 데 성공하면서 그때까지 원소가 누려왔던 명분적 우위를 뒤집으면서 두 사람의 지위는 뒤바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원소는 때가 늦었고 결국 자존심 대립으로 이어지다 관도전투 패배 후 그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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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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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 석탈해 후손의 현황은 어떠한가요?
신라의 4대 국왕 석탈해 이외에도 9대 벌휴이사금, 10대 나해이사금, 11대 조분이사금, 12대 첨해이사금, 14대 유례이사금, 15대 기림이사금, 16대 흘해이사금 등 8명이 석씨 출신 왕입니다. 석탈해 후손으로 석씨(昔氏)에 대해서는 강수는 아버지가 석체로 보아 석씨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경주 월성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나 그 후 계대가 실전되었으며, 고려 시대 교서랑을 지낸 석재흥을 1세조로 받들어 계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 현재 경주 석씨는 7996명, 월성석씨도 1522명으로 알려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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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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