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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언제 건립이 되었는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습니다.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음력 10월 태조가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습니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행복이 가득한 집'이죠. 풍수지리적으로도 북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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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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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게 된 배경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조영의 고구려 유민으로 걸걸중상의 아들입니다. 고구려가 668년 멸망하고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당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유민들을 영주로 옮겨 감시, 관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조영이 살던 시대 당나라 국경도시 영주는 고구려 유민 외에도 거란, 말갈 등 강제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영주는 넓은 지역이라 치안 상태가 늘 불안했습니다. 강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대개 귀족이나 벼슬아치 등 유력자들이었다. 또 중국 내지로 끌려가던 고구려 포로 가운데 일부도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당나라는 이들을 이곳에 살게 하면서 회유해서 복종시키거나 호되게 강제 노역으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거란 추장 출신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 도독을 죽이고 영주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은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탈출하여 동쪽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당군은 추격전을 펼쳤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마침내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토섭하여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6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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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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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님은 왜 며느리를 쫓아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 대왕은 총 4명의 며느리를 쫒아냈습니다. 휘빈 김씨 (세자 향의 세자빈)는 세자 향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다가 발각되어 내쫓겼습니다. 그리고 순빈 봉씨(세자 향의 두 번째 아내)는 결혼한 지 7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고, 아이를 갖지도 않았으면서 임신했다가 낙태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게다가 순빈 봉씨는 궁궐 여종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는 "열두 살이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하여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라는 이유로 내쫓겼습니다. 그리고 영응대군의 처 송씨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내쫓겼습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쫓겨난 송씨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나 두 명의 딸을 낳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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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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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체조는 누가 만들었나요? 전국민적으로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민체조는 1977년부터 보급한 체조입니다. 음악과 구령에 맞춰 12개 동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표준 음악에 구령을 붙인 사람은 경희대학교 유금림 교수입니다. 국민체조 이전에도 신세기 체조, 재건 체조, 국민 보건 체조 가이 있었습니다. 전 시대의 체조들과 차별화를 선언하여 탄생한 총 4분 25초의 국민 체조가 탄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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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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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정착을 하면서 거주하던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생활하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부터입니다. 한반도에 인류가 생활했던 시기, 즉 구석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70만년까지 확인 가능합니다. 그러나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을 위해 정착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약 1만년전부터 기온이 상승하고, 한반도의 식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착하여 변화된 식생에 적응하여 살았습니다. 이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모여 마을을 만들어 간단한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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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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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 개당 가치가 가장 높았던 화폐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엽전 가운데 가장 가치가 큰 것은 당백전이었습니다. 당백전은 1866년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6개월 동안 발행하여 유통되었습니다. 실치 가치는 상평 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으나 100배의 명목 가치로 통용시키기 위해 주조되었습니다.엽전 이외에도 은전이 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은전은 은을 주원료로 해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 유통한 화폐입니다. 은 자체의 가치 때문에 주로 고액환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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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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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무왕릉은 제30대 문무왕 (661∼681 재위)의 무덤으로 바닷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입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통합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며 우리나라 최초로 통일국가를 완성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내가 죽은 뒤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내라.”라고 유언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이런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아들인 신문왕이 바다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 (大王巖)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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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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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규장각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의 학문 연구 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정조에 의해 177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초계 문신, 왕실 비서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습니다.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두었다가 이듬해 규장원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름이 없어지고 도서는 이왕직에 도서실을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다 총독부 취조국으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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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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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기에 좌익 단체들은 신탁통치를 왜 찬성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결과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의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익 단체들은 신탁통치를 또다른 식민지의 연장이라고 여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좌익 단체들도 처음에는 반탁 운동을 전개했으나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 온 반탁 운동은 '모스크바 결정 지지' 운동으로 돌아섰습니다. 즉 신탁통치를 포함하여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 것이죠. 그 이유는 신탁통치를 식민지배가 아닌 후견으로 해석했으며, 얼마든지 우리의 노력에 의해 단축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통일 정부 수립을 우선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익이 이런 태도를 신탁 통치 수용으로 해석한 우익에서는 결력하게 배척했고, 반공 반소 운동을 확대되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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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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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처음으로 들어온거는 일본에서 라는데 맞는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맥주가 들어온 시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면서부터입니다. 일본으로부터 삿포로 맥주가 처음 들어왔으며, 에비스 맥주, 기린 맥주가 연달아 수입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상류층들 사이에서만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5년 전인 1871년에 맥주에 관련된 사진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Chief of the village of Roze Island'라는 이름의 사진으로 지금의 인천 월미도의 마을 이장이 맥주병을 안고 있는 사진입니다. 신미양요 때 외국군에 의해 유입된 맥주병이라고 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의 저자이며 술 칼럼니스트인 명욱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진의 주인공은 마을 이장이 아니라 문정관이라는 직책의 하급관리이며, 햡상을 하러 올라간 미국 군함에서 맥주를 대접받고 빈병을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진의 맥주는 우리나라에 유통 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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