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관찰사는 정유재란 이후 대마도에 대해서 보복전을 건의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량해전으로 정유재란이 종결된 지 얼마지나지 안항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상소로 대마도 보복전에 대한 상소를 올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본인 왜란 중 강화회담 기간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 명군이 아직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아 조명연합 작전 가능하다는 이유입니다.그러나 왜란으로 조선의 병력 손실, 대마도에 대한 일본 본토에 구원 수월, 대마도 점령 이후 수성 문제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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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정권을 잡을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박정희를 비롯한 정변 세력은 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고 박정희는 의장으로서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혁명공약에 과업이 이루어지면 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어기고 1963년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반공과 경제를 앞세워 집권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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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나주향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었다는데 나주향교는 어떤 업무를 보던 곳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성종이 전국에 처음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입니다. 나주향교는 우리나라 3대 향교 중 하나로 태조 7년(1398)에 지었으며, 내부에 계성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았습니다. 이로 인해 향교의 배치방법이 다른 향교와 다릅니다. 명륜당은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공간으로 이곳에서는 계성사가 있기 때문에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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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무엇이고 임시정부는 삼균주의를 어떻게 체계화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소앙은 국가는 정치, 교육, 경제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을 실현하는 국가를 수립하고, 나아가 민족과 민족의 균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실현하고지 하였습니다. 조소앙의 3균주의는 1941년 건국강령에 반영되었습니다. 따라서 보통선거를 통한 정치적 균등, 무상 및 고등 교육을 통한 교육 균등, 그리고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 실현을 통한 경제적 균등을 국가 건설에 반영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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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왜 다른 나라로부터 우리나라의 철도부설권을 가져왔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물로써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본투자를 통해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자본 수익 이외에도 자신들의 상품을 수송하고 식량 및 수탈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신속한 병력 이동을 통해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도 우리나라 철도 부설에 적극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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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흑묘백묘론은 중국의 덩샤오핑이 주장한 말입니다. 즉 흰 고양이건 검은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주장하였고, 시장 경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인민들이 잘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이냐 아니냐의 핵심이라고 주장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중국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 실용주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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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옛 이름이 경성이었나요? 일본이지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성'이라는 명칭은 수도(京)+성곽(城)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명이라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서울'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보통명사입니다. 즉 경성 명칭 자체는 일본이 만든 말은 아닙니다.그러나 일제강점기 경성은 일제가 강제로 한양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고 한양 일부를 하나로 묶어 '경성부'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이전의 보통 명사의 '경성'과 일제 강점기 고유명사 '경성'은 구분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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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몽골조상 인가요 아님 중국조상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진(女眞)은 퉁구스계 종족 집단 가운데서도 만주 일부 지방에 살았던 숙신-말갈계의 후손이입니다. 따라서 말갈족 부족은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였다가 당나라 양주로 이주하였으며,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발해의 피지배층이 됩니다. 발해에 한때 저항한 흑수말갈은 훗날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으로 불리다 고려에 복속됩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후금으로 이어집니다.따라서 몽골과는 다른 민족이고, 거란이 몽골어족 동호계 유목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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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도 달력이라는 것이 존재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는 중국의 남조인 송(宋)나라에서 역법을 받아들여 사용했습니다. 중국의 후주서 열전 이역조와 수서 열전 동이조에는 ‘백제 해음양오행 용송원가력 이건인월위세수(百濟 解陰陽五行 用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남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554년 2월 역박사 고덕 왕보손이 일본으로 건너와 역법을 가르쳤고, 602년 10월 백제의 중 관륵이 역서(曆書), 천문, 지리,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가르쳤으며, 일본은 이것을 배워 604년부터 역법을 사용하게 됩니다.고구려와 신라는 당(唐)나라에서 만들어진 역법을 사용했습니다. 고구려가 역법을 사용한 기록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있습니다. 624년 2월에 고구려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역서를 얻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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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양반도 잡과에 응시가 가능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잡과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관이나 잡학생도였습니다. 양반 자제들은 잡과에 응시하는 것을 기피하였습니다. 조선은 기술을 천시하였고, 스스로 양반의 신분을 내버리고 중인으로 강등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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