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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현종은 피난을 갔는데 호족한테 홀대받았다는데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현종의 몽진의 고려가 창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호족의 권위가 아직 남아 있던 시기입니다. 실제로 고려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하면서 호족으로 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고려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국가’로 출발했습니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지방 호족들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서로 간의 연합체 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지방 호족은 언제든지 임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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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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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참전한 계기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의 참전은 외적으로 보면 조선의 청원에 의해 구원을 하는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 오히려 조선의 힘을 빌려 명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토목의 변이 일어났으며,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후금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판국에 일본이 명을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나서고, 명과 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큰 위기 상황에 직면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됩니다. 조선은 명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입술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쌓이는건 명나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원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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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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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왜 전당,후당으로 나누지 않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같은 나라를 구분할 때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기준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주는 호경에서 뤄양으로 천도했는데, 각각 서주와 동주입니다. 한도 시안과 뤄양으로 달라졌는데, 전한(서한)과 후한(동한)으로 구분합니다. 송도 카이펑과 항저우로 천도하여 북송과 남송이죠.그런데, 당나라는 수도가 장안이지만 뤄양도 장안 다음으로 수도 역할을 하였기에 특별히 구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이 907년에 주전충에게 멸망하고 후량 다음에 뤄양을 수도로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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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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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한복은 언제부터 입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시대에 이미 초의(풀 옷)에서 벗어나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고 전잠(누에)과 베 짜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복이 진전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한복이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대체로 저고리바지, 치마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띠를 대며 발에는 화(신발)를 신어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그 위에 두루마기를 입어 현대의 한복으로 자리매김을 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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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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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수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 1년으로 정하고(기원) 그 이전을 Before Christ의 약자 BC(기원전)로 표기하고, 그 이후를 라틴어 Anno Domini(주님의 해)의 약자인 AD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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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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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와 병인양요의 차이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인박해는 1866년 천주교 신자 박해입니다. 대원군은 원래 묵시적으로 천주교를 인정했던 인물입니다. 1860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러시아가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요구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 때 대원군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방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가 만남이 어렵게 되고 중국에서 영불 연합군의 살육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변하여 천주교 탄압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병인박해로 선교사 9명을 비롯해 8000여명의 신자가 순교하게 됩니다.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가 침략한 행위입니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군함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강화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격전을 벌였고, 양헌수 부대가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프랑스군은 더 견디지 못하고 약 1개월 만에 철수하였습니다. 프랑스는 물러가면서 강화도의 주요 시설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등 귀중한 문화유산과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5,000여 권의 귀중한 왕실 도서가 불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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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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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국자감에는 입학할 수 있는 신분은 어디까지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국자감은 귀족에서 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입학이 가능합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으며 유학부는 귀족의 자제, 기술학부는 중간 계층이 입학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유학부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으로 구분라여 각 3, 5, 7품이상의 자제로 입학 자격을 제한했습니다. 즉 기술학부의 율학생 · 서학생 · 산학생은 주현의 학생과 8품 이하의 아들 및 서인, 7품 이상의 아들로 원하는 자들이 입학하였습니다. 유학부는 관료 자손에 제한된 반면에 기술학부는 관료의 아들은 물론 향리의 자제, 서인까지 입학할 수 있어 입학 대상의 범주가 넓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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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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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황제국을 칭하며 천수(태조), 광덕, 준풍(광종) 등 독자적 연호는 물론 폐하, 짐(朕), 태자(太子), 황후(皇后)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황제국을 자처하며 자국을 중심으로 세계(천하)를 인식하였습니다.그러나 '금'나라에 사대, 원의 간섭으로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내려 앉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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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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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역사적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삼천궁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백제고기' 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부여 북쪽큰 바위에 후궁들이 모여 스스로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를 이끌고 떨어져 죽었다'라는 내용과 함께 바위이름을 '타사암( 정 )'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당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 역사서보다 더 많이 기록한 옆나라 대륙이나, 일본 역사서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이라도 극히 소수였을 것이며, 낙화암의 규모나 백마강의 수심 및 지형을 보아도 대규모 집단 자살은 불가능합니다.고려 말 충신 이존오가 쓴 칠언고시에, 백제 멸망 및 타사암을 가리키는 시적표협으로 '낙화암'이 등장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조선 초 성종 때 문신 김흔은 '낙화암'이라는 시를 쓰며, 처음으로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썼어요. 또다른 성종 때 문신 조위도 '부여회고 차가정운'이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언급하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조선 중기 중종 때 문신 민제인은 '백마강부'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조선 성종 때를 거치며 타사암은 "닉화암'이 되었고, 중증 때를 거치며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기정 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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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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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영역중 독자적인 정권이 허락된 곳은 고려가 유일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몽골이 1231년 침략한 이래 28년간(1231-1259) 6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강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온 고종은 몽골에 항복 사절로 태자(훗날 원종)를 몽케 칸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몽케 칸은 당시 쓰촨성에서 남송과 싸우다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태자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황제 쟁탈전을 벌이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가운데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와 전쟁 중에 20년 이상 침략해도 무너지지 않은 고려가 제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훗날 태자의 선택은 적중했습니다. 칸 쟁탈전에서 쿠빌라이가 칸이 된것입니다. 만약 아리크부카가 칸이 되었으면 고려에게는 끔찍한 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이 때 쿠빌라이는 자신을 찾아온 태자에게 극진히 대하고, 미래를 보장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 시기는 고려의 형편대로 하라….”(<원고려기사> 1260년 6월)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고려는 원이 지나치게 간섭할 때마다 '세조구제'를 들먹입니다. 1323년(충숙왕 10년) 몽골(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설치, 사실상 흡수통합을 강행하려 합니다. 그러자 이제현(1287~1367)은 몽골 조정에 기막힌 상소문을 올립니다. “일찍이 세조(쿠빌라이) 황제께서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라 했는데…. 그런데도 성(省)을 설치하려 한다면 세조 황제의 유훈은 어찌할 것입니까. 세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며 세조의 유훈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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