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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서는 어떤 관청이고 조광조는 왜 소격서 폐지를 주장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격서는 도교의 초제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즉 신선과 별자리에 제사 의식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소격서는 도교의 상징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성리학 관료들은 페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1518년 조광조 등 사림들의 강력한 건의를 통해 혁파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다시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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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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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 백년전쟁은 어떻게 발발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스 안의 영국령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 왕 필립4세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인 영국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샤를4세의 후계자로서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자 충돌하였습니다(백년 전쟁, 1337~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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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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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왕자 장보고에 대한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된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이 해적으로 팔려 오는 것을 목격하고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청해진을 근거로 동중국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후원하였습니다. 장보고는 막대한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왕권 다툼에 관여해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과 자신의 딸의 혼인 문제로 대립하다 암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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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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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건은 왜 거란이 보내준 낙타를 다 죽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서경(평양)을 북진의 전진 기지로 삼아 영토를 확장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친선 관계를 맺고자 접근해 왔지만 강력히 배척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을 포용했는데, 그 이유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스스로 고려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고려 입장와 같은 국가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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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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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신분은 어떻게 나뉘어져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신분 제도는 법제상으로 자유민인 양인과 부자유민인 천인을 구 분하는 양천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은 조세와 국역을 부담하였지만,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을 하는 데 법적인 제한이 없었습니다. 천인은 각종 천역을 담당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 양인을 늘려 국가 기반의 안정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인층 안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반상제가 더해지면 서 신분 구조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어 정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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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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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장수 소배압은 어떤 인물인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배압은 거란 경종의 딸인 위국공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소손녕의 형입니다. 몽골족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986년 하북으로 진격해온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개경을 점령하고, 1018년 3차 침입시 10만 대군을 지휘하였으나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대패하여 귀국후 파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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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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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재위시기 시행한 균역법은 양반은 군포 부담이 제외되었는데, 왜 균역법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조시기 일반 백성의 군역 부담이 늘어나자 양역을 변통하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결포론, 호포론 등 면제자들도 부담을 지게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계획은 시행 반 년 만에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군역 부담을 줄여주는 감포론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즉 양인이 부담해야 할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주고, 부족한 양만큼 보충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양역을 지게 된 선무군관들이나 어염세, 선세를 거두고 있던 궁방(宮房) 등에서 불만을 토로해왔습니다. 결국 영조는 기존의 균역법 내용을 다시 보완하여 1751년(영조 27) 9월에 균역법을 공포하게 되었습니다.균역법 시행에 따라 양인의 군역 부담은 2필에서 1필로 줄였고, 기존에 각 궁방이나 아문이 점유하고 있던 어염세, 선세를 중앙 기관에서 수취하게 되면서 특정 기구의 특권을 없앴으며, 상층 양인들에게 선무군관이라 하여 군포 부담을 확대했습니다. 비록 양반은 제외되었지만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던 군포 부담을 1필로 확정한 것 역시 양인들 간의 부담을 균등하게 한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균역법이라 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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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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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는 양천이 구분되고, 세부적으로 반상제(양반, 중인, 상민, 천민)가 존재했습니다. 즉 태어나면서 부터 신분이 정해진 귀속지위입니다. 다만 고대, 중세 시대에 비해서는 신분 이동이 가능한 개방사회였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는 군공, 공명첩, 납속 이외에도 족보 매입 및 위조, 도망 등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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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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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에는 어떤 유형의 자산이 가치가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석기 시대는 생존을 위한 것들이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단 먹거리가 최고 중요하죠. 당시는 먹이를 찾아 이동했으니 음식이 최고 가티입니다. 두번째는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호신도구, 옷 등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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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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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왜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3년 12월 2차세계 대전중에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적절한 절차를 거쳐'를 붙였습니다. 여기서 신탁통치를 염두해 두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광복 직후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합의했어요.그러나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모스크바 합의도 무산되면서 신탁통치도 폐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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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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