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조선 총독부는 무슨 일을 하던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총독부는 일본이 1910년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기관으로 만든 조직입니다. 조선 총독은 총독부의 최고 통치자로 행정, 입법, 군사권을 장악하고 일본 내각의 지휘를 거의 받지 않고, 일왕 직속의 절대군주와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총독은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8명의 현역 군인 출신으로 한국을 병영처럼 지배했습니다.총독의 아래에는 행정을 맡은 정무총감, 치안을 담당한 경무총감이 있었습니다. 총독부 청사는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하고 1926년 새로 건축되었으며, 광복직후 정부청사, 박물관으로 사용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1995년 철거하기 시작해 1996년 완전 제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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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원군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정명가도'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명을 칠테니 조선에 길을 빌려잘라는 것입니다. 명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선전포고입니다. 실제로 왜군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까지 진격했습니다. 조선에서 명에 원군 요청도 있었지만 자칫하다 압록강을 왜군이 넘어 진격하면 바로 요동, 명의 수도 베이징에 다다릅니다.만주에 여진이 있다라는 의미는 당시 조선과 명이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아직은 여진족이 국가체계를 갖춘 나라도 아니기에 염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조선은 명의 울타리로 명을 지키기 위해서도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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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백정이라는 신분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서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백(白)'은 '없다', '아니다'의 의미와 '정(丁)'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정이 아니기에 '정'이 가지고 있었던 직역이 없는 일반 백성으로 주로 군현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고 사는 농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살업자라 불리는 백정은 원래 화척, 양수척이라 불렸습니다. 북방 귀화인으로서 일반 민중과 융합되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며 특수 부락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이들은 가축 도살 및 고리 제작을 부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왜구로 가장하여 민가을 약탈하는 등 문제를 많아 백성들로 부터 배척되었습니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해 주기 위하여 백정에 편입시켰고, 일반 민중은 이들은 신백정(新白丁)이라 하였으나 종래 평민 중에서 약간 천인 축에 있던 백정보다는 양수척으로 백정에 편입된 신백정이 사회적으로 폐단이 될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이후 백정이란 명칭은 신백정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천민 신분은 사라졌으나 호적에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이라 기록하여 차별이 지속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1923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가 조직되고 사회적 차별 철폐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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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석벽에 있었다는 서불과차라는 글자의 뜻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의 시황제의 명을 받고 불노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서불)이 동남동녀 3000명을 대선단을 이끌고 나섰습니다.<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은 바로 금강산과 한라산, 두류산이라고 조선 신숙주는 비정하기도 합니다. 서귀포의 지명 및 정방폭포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는 오래 전부터 중국을 떠난 서복이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흔적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당시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바다로 나온 서복이 제주도에 왔고, 이곳을 지나면서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徐福過之)'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한 제주에서 불로초를 구한 서복이 '서쪽(西向)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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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문명의 주인공은 '하'(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 라고 하지만 실체를 명확하지 않은 반 전설적인 국가입니다. 그리고 상나라(기원전 1600~ 기원전 1046년경)도 실체가 확인된 나라로 여러 차례를 수도를 옮겨 다녔고, 화북 지방 중심으로 지배한 왕조입니다. 또한 주나라(기원전 1046년경 ~ 기원전 256년) 상나라를 대신하여 호경을 중심으로 한 왕조이지만 봉건제 체제로 실질적으로 현재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중국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수도를 뤄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춘추전국시대로 제후국들이 실질적으로 군웅할거한 시대입니다. 춘추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강남의 초, 오, 월이 중국 역사 무대에 포함되게 됩니다. 진 나라도 전국시대의 한 나라였으며, 진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직접 지방관을 파견(군현제)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황제가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결론적으로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는 실질적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통일 왕조 진(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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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때 4군6진으로 영토를 넓힐때 명나라는 왜 반응이 없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 조 4군 6진의 개척은 명이 아니라 여진족과의 관계입니다. 당시 명의 최 북단은 북직례성으로 요동 수도 베이징(北京)을 포함하고 있기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입니다. 청나라 때 북(北)자를 빼고 그냥 직례성이 되죠. 따라서 4군 6진은 명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으며, 여진족이 1616년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이 성립될 때까지 부족 단위로 생활했습니다.참고로 4군은 사군은 압록상 상류에 두었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을 말하며, 세종(1443) 시기 최윤덕이 개척하였습니다. 6진은 두만강 하류에 설치한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을 말하며, 1443년부터 10년에 걸쳐 김종서의 주도로 개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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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왕들은 왜 묘호가 없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왕 가운데 태조부터 원종까지는 묘호와 시호가 모두 있었지만 충렬왕 대부터 시호는 있으나 묘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간섭기는 원의 고려 왕실 격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충렬왕 때부터 충정왕까지의 원이 부마국으로 묘호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로 격하되었습니다. 즉 제후, 신하로서 황제만 묘호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도 사후에 원을 대신해서 명이 건국되었으며, 명에 대한 사대의 예로 우왕대 묘호가 아닌 시호만 올려 묘호가 없습니다. 우왕과 창왕은 조선을 건국한 주도자들에 의해 신돈의 자녀로 왕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역사서에도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휘)인 우와 창에 단순히 왕을 붙여 사용한 정도입니다.공양왕은 폐위된 왕으로 조선 건국초에 '공양군'이었으나 태종대 추증하여 공양왕의 시호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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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와 중국이 자기네 나라라 하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입니다. 먼저, 건국 세력입니다. 698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대중상와 함께 양만춘의 부하로 안시성 싸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구당서>의 기록에서도 '발해 말갈은 고구려의 별종이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두번째로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들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과 성립되었으며, 고구려의 대부분의 영토를 지배하였습니다. 세번째로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합니다. 일본의 <속일본기>에도 '우리는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째 문화적으로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발해의 온돌, 건물, 불상 등 고구려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외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항쟁(장문휴의 산둥 공격), 당의 외국인 전용 빈공과 시험 응시, 황제와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 등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으로 치부합니다. 그 근거로 발해의 백성이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갈족은 만주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로 현재는 중국 영역에 있지만 한번도 한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3성 6부 사용 등 자신들의 문화권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3성 6부 체제는 당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적인 요소이고, 수용하였지만 발해 나름의 주체적으로 변형하여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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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실시한 '탕평책' 이후로 어떤점이 바뀌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탕평책은 붕당에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입니다. 그 배경은 숙종 당시 환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조대 처음으로 시행됩니다.특히 정조는 영조 때 탕평책을 수용하여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하였습니다. 대표적 사례로 채제공, 정약용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외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제, 서얼허통 등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 재위 당시 탕평책은 인재의 고른 등용 의미와 다르게 왕권의 강화를 통해 붕당의 억제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실제로 영조는 탕평파를 육성했으며, 외척 세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도 또한 규장각과 초계문신을 통한 측근 세력 육성과 화성과 장용성 설치 등 군사권 강화가 목적인 것도 사실입니다.즉, 강력한 왕권을 통해 일시적으로 붕당을 억제하였으며 붕당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정조의 사후 순조 때부터 권력이 외척에게 넘어가 세도정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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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만적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로서 1170년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신분제의 동요 과정에서 반란을 도모한 인물입니다. 만적은 1198년 만적을 비롯한 6명의 사노비들이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들을 불러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거사를 약속한 노비 가운데 배신자가 계획을 누설하면서 죽임을 당해 실패하게 됩니다.만적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고려 사회의 신분제 속에서 천민(노비)의 차별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히 노비는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며, 소나 말보다 가치가 낮고, 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신 정변 과정에서 이의민 등과 같이 천민 출신 가운데 신분 상승한 사례를 목격하고 자신들도 신분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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