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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의 크기는 어떻게 정해 졌나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덩 형식입니다. 전북 고창의 고인돌 가운데 길이가 6.5m나 이르는 고인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인돌의 크기는 다양하고 특정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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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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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들의 지혜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인류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진보했습니다. 특히 실패, 좌절의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역사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하고 교육으로 강화하여 실패의 확률을 최소화하려 했습니다. 제시한 속담도 이런 의도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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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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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선조들이 사용해온 온돌에는 어떤 원리가 있나요?
온돌은 우리나라의 전통 난방 시스템입니다. 온돌은 아궁이에서 도랑 모양으로 만들어 구들장을 덮고, 그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때면 온돌 바닥과 구들장 아래 고래에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열기가 구들장을 데워 따뜻하게 데워주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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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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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패망후에도 당시 조선에 남은 일본인들의 숫자는?
개항 이후 점차 늘어난 재조선 일본인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1876년 개항 당시 부산에 있던 일본인은 54명에 불과했습니다.그러나 1879년 원산 개항과 1880년 원산의 일본 영사관 개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일본 조계의 설정, 그리고 같은 해 한성(서울)의 개방 등으로 차츰 증가해 갔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는 4,356명, 청일 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는 9,354명이 되었습니다. 러일 전쟁 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통감부를 두고 각지에 이사청을 설치한 뒤부터 일본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1905년 말 42,460명, 1906년 말 83,315명이었고, 강점 직후인 1910년 말에는 171,543명으로 늘어났습니다.이후 재조일본인은 1919년에는 346,619명, 일본이 패전한 1945년에는 약 8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71만명이 단돈 1000엔을 들도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10만명 가량은 여러 이유로 한국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여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 용산구 이촌 1동에는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해 리틀 도쿄라 불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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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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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은 누구일까요?
고려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국왕은 광종과 성종입니다. 광종은 호족의 득세로 왕권이 미약하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종은 노비안검법, 과거제, 공복제 등을 시행하여 왕권의 안정에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종은 광종의 왕권 안정을 기반으로 2성 6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유교 통치 이념을 확립하였습니다. 이로써 문치 주의 전통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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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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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지역이 국악이나 판소리등으로 유명하다는데 유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국악과 판소리가 유명하게 된 배경은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입니디ㅏ. 조선 후기 수많은 소리꾼들이 판소리에 활동하였습니다. '전기 8명창 시대'에는 판소리 12마당으로 완성되고, 훌륭한 명창들이 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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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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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계급제는 어떻게 나뉘었나요?
청동기 시대에는 농기구가 발달하고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어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습니다. 이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면서 빈부 격차가 발생했으며, 계급 분화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동제 무기 사용으로 정복 활동으로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의 분화가 촉진되었습니다.당시 신분 유형으로 왕족, 그리고 귀족, 평민, 노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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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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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악신이라고 부르는 유래가 있다고 하더군요. 옛날 어르신들은 왜 설악산이라고 지었나요?
<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설악산은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산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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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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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가계도 공유 부탁드립니다
1920년 3월 5일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여러 차례 경영권이 바뀌었으며 1924년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정체성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6대 사장 안재홍이 구석되고, 7대 유진태, 8대 조만식을 거쳐 1933년 9대 방응모가 취임합니다. 방응모는 1924년 금광업에 뛰어 들어 큰 부를 이루고 1932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영업 국장이 되어 판매망을 장악하였습니다. 1933년 3월 부사장을 거쳐 같은해 7월 사장이 됩니다. 그는 친일 잡지 조광 창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에서 친일 행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방응모의 양자 방일영, 방일영의 첫째 아들 방상훈(1970), 그리고 방상훈의 첫째 아들 방준오(2024~)가 사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계열사인 TV 조선은 방상훈의 차남 방정오, 코리아나 호텔은 방상훈의 둘째 아들인 방용훈이 사장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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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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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은 어떻게 다른가요?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은 그 칼날의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모양이 악기 비파를 닮았으며, 세형 동검은 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청동기 시대에 제작되었으며,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는 동검입니다. 세형 동검은 철기 시대에 제작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독자 생산된 한국식 동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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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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