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재는 어떤 의식이고 해 주는게 좋을까요?
천도재는 불교에서 영가(망자의 영혼)를 천도(극락)로 보내는 의식입니다. 즉,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 천도제의 주된 목적입니다. 영가가 환상에서 깨어나 좋은 인연을 찾아 태어나도록 돕는것을 말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일제강점기때 강제지용의 역사를 간직한 일본의 사도광산은 어떤곳인가요?
사도 광산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에 있는 금광으로 1601년 발견되어 에도 시대 초기 최대 금광산이었습니다. 금과 은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막부에 상납하고, 은은 청나라 등에 수출되어 '세다은'을 불렸습니다.현재 사도 광산은 세계 유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나 유네스코 이코모스는 "세계 유산 목록으로 고려될 만한 가치가 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하지만 여러 지적 사항을 붙어 보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8가지 지적 사항 가운데 하나가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포함한 사도 광산의 전체 역사를 설명할 것을 권고합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약 1500명에 이르르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으로 입증된 상태입니다.일본 정부는 이코모스가 지적한 일부 내용은 수행하지만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노골적으로 피하려고 세계 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로만 한정하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일제시대에 부산의 독립투사인 박재혁의사는 어떤분었는가요?
박재혁 의사는 1895년 부산 동래 범일동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의열단의 단원으로 1920년 9월 부산경찰서에서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1921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대구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습니다. 수감 중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격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단식으로 옥사하였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시대의 실학이 현대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요?
실학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사상으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실학 연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상 연구에 머물렀습니다. 그렇지만 실학 연구는 한국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학의 사회 개혁 정신을 계승되었습니다. 실학자의 현실 개혁 의지는 현대 한국 사회 개혁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용적인 학문관도 오늘날 연구자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외에도 실학자들의 사회 변동에 대한 인식 등이 현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역사관련 소설이나 역사책을 읽다보면 비둘기를 통신수단으로 쓰던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비둘기는 오래전 부터 통신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둘기가 귀소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용해서 메시지를 실어 보냅니다. 특히 전쟁 중 비둘기를 군용 통신 수단으로 고대부터 비둘기를 통신에 통신으로 이용했는데, '전서구'라는 비둘기가 유명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비둘기로 제국 구석구석에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보불전쟁(1870~71년) 때부터 비둘기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파리가 프러시아군에 포위되자 파리 시민들은 전서구를 이용해 외부와 통신을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프러시아군은 전서구를 잡기 위해 매를 대대적으로 풀어놓았죠.1차 세계대전에선 비둘기가 대대적으로 동원됐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가장 유명한 전서구는 쉘아미(cher Amiㆍ‘친애하는 친구’라는 뜻의 프랑스말)는 암컷 비둘기로 영국에서 태어나 미 육군 통신대에 기증돼 1차 세계대전 동안 전서구로 사용됐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김해시 은하사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어떤 가치가 있는 문화재인가요?
은하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한 곧은 자세와 당당한 신체 표현, 넓고 큰 얼굴 입체감 있는 옷자락 등 뛰어난 조각 기법이 돋보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전남장성에 있는 백양사에 모시고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언제 제작된 것인가요?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불상 높이 205㎝, 무릎 폭 148㎝. 나무로 전체 윤곽을 만들고 주름이나 살집 등을 표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흙을 활용하여 완성한 불상입니다. 높이 2m가 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불상으로, 낮고 넓은 무릎과 늘씬한 상체를 가지고 있어 장대한 형태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대한 형태미는 17세기 전반기의 대형 소조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북상의 정확한 조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2005년 2월 발견된 복장물에서 1741년 명부전의 시왕상 중수와 함께 개금 불사를 생했했다는 복장기가 발견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전연이 고구려에 침략한 후 고구려의 태자가 사신으로 갔다왔다하던데 이에 대해 궁금합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은 331년 즉위하여 41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요동과 부여 지역을 놓고 전연과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342년 11월 전연은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미천왕의 시신과 왕비를 인질로 잡아갔습니다.이에 343년 전연에 사신을 보내 신하를 자칭함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355년 되어서야 어머니가 고구려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 파견된 사신으로 태자가 소수림왕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나이가 맞지 않고, 따라서 일찍 요절한 이복, 또는 동복형일 수 있다고 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이 고종을 설득하여 경우궁으로 처소를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 인사인 김옥균과 박영효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설득하여 처소를 경우궁으로 옮깁니다. 그 이유는 우선 국왕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경우궁은 좁아 소수이 정변 세력이 더욱 방어하기 용이했습니다. 또한 경우궁은 청의 군사적 영향력이 제한적이라 생각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이 미국과 1882년 조약을 체결하면서 강화도 조약에 없는 거중조정이 포함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미국과 수교를 합니다. 그런데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거중조정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데 중요한 영향준 것으로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를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했습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조선이 외국으로 부터 침략 등 피해를 당했을 때 미국이 중간에서 조선을 위해 역할해준다는 '거중조정'을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