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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 공물로 바쳐진 여인들이 있다는데
명나라에도 조선 초기 공녀를 보냈습니다. 공식적으로 영락제와 선덕제 치하에 7차례에 걸쳐 114명이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향했습니다. 이 공녀들은 명나라에서 후궁이 되거나 황제의 유희를 위해 가무나 음식 조리 같은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순장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확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여동생 두명을 공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각기 명나라 3대 황제 성조 영락제와 5대 황제 성종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확은 대명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고 조선과 명의 외교에 주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명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 외교이기 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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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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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라이시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 이란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에브라함 라이시는 아야톨리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의 측근이며, 강경 보수 주의자입니다. 라이시는 이란 사법부 수장을 역임했고, 강경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대 이란에선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형 집행이 진행됐는데, 많은 이란인들과 인권 활동가들은 그 배후에 라이시가 있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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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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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한반도 안에 사는 사람들만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나요? 한반도 이외의 사람은 모두 다른 민족이였나요?
삼국시대는 삼국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희박했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히 만주 등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 대한 동족 의식은 없었을 것립니다. 그러나 삼국이 통일되고 통일신라가 되고, 민족 융합을 위해 정책으로 노력했습니다. 예를들어 중앙군의 9서당은 신라인 이외에 백제, 고구려 유민도 포함되었으며, 지방 행정 구역도 각국에 3주씩 9주였습니다. 따라서 통일 신라 이후 일통 삼한 의식이 강화되어 한민족 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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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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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주리를 튼다 에서 주리가 대체 뭔가요?
"주리를 튼다"에서 '주리'는 '주뢰(周牢)'가 변한 것입니다. 사극에서 주리는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막대 두개를 끼워 비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사용하는 기다란 막대기를 '주릿대', '주릿방망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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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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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중에서 6월에 망종이라고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망종은 24절기 가운데 하나로 양력을 6월 6일 전후입니다. 이는 벼나 보리 수염이 있는 곡식의 파종에 좋은 때를 말합니다. 풍요로운 농사를 기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망종은 농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농촌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또한 여름 꽃이 만발하는 시기와도 일치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조상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는 절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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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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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태자와 오우치 가문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오우치 가문은 백제 성왕의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가 일본으로 건너가 스오국의 다타라하마(多々良浜) 바닷가에 도착한 후 오우치(大內) 마을에 거주하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임성태자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본에 문화와 불법을 전하러 가 살았다고 합니다. 오우치 가문은 점차 번성해 헤이안 시대에 그 이름을 떨쳤으며, 남북조 시대 가문이 둘로 나뉘어 참전해 우여곡절을 거쳐 스오, 나카도, 이와미, 부젠, 이즈미, 키이의 수호직을 맞는 대 가문이 됩니다. 오우치 요시타가는 7개 구니를 다스리는 전국 다이묘가 됩니다. 오우치 가문은 전국 시대 이후에도 대영주 귀족 집안으로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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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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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 일본과 사이가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명이 청에 멸망한 이후 대만은 정성공을 중심으로 반청 운동의 근거지였으나 1683년 강희제에 의해 정벌되어 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1895년에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일본은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측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대만 통치 과정에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1949년에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이 점령하면서,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만의 일부에서 일본 치하를 그리워 하기도 합니다.최근 대만과 일본 사이는 서로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문화 교류가 활발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긴밀한 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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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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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조가 단종을 죽이지 않았다면, 조선은 세종 때 처럼 계속 발전할 수 있었을 까요?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지만 세조가 단종을 죽이지 않았다면 여러 추론이 가능합니다. 우선 계유정난으로 통해 권력을 잡은 세조는 단종이 살아 있다며 계속해서 단종 복위 운동과 같은 정치적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세조와 단종 간의 권력 암투가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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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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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은 왜 요동정벌군에서 빠진 건가요?
163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1387년 명은 과거 쌍성총관부 지역을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청의 통보에 거부하여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습니다.결국 최영은 스스로 팔도도통사를 맡아 출정을 하려했으나 최영의 사위였던 우왕이 "선왕이 시해당한 것은 경이 남쪽(탐라)을 정벌하느라 개경을 비워서 선왕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경이 북쪽으로 가버리면 내 옆은 누가 지켜주느냐?"라며 말렸습니다. 따라서 좌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군사 지위권을 넘기는 패착을 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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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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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은 조선을 어떻게 평가하게 되었나요?
하멜은 17세기 제주도에 표류하여 13년간 억류된 후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간 인물입니다. 그는 표류한 사실을 <하멜 표류기>로 작성하여 우선적으로 서양인의 시각에서 조선의 사회, 문화, 정치에 대해 중요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조선의 의복, 음식, 생활 습관, 관혼 상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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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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