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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오래동안 태극기의 기원에 대해 박영효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앞서 1882년 고종이 도안하여 국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태극기 제작의 직접적 계기는 <조선책략>(황준헌)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모양 제시입니다. 이후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슈펠트 제독이 조선이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말하며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홍집이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안에서 태극기를 직접 그려 조약 체결식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그리고 같은 해 9월 수신사로 가던 박영효가 증기선 안에서 태극기를 직접 그려 사용하였습니다. 1883년 1월 27일 고종 황제에 의해 공식 반포되었으며 시대 격변을 거쳐 1949년 10월 15일 국기 제작법 고시가 확정 발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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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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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이유를 알려주세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우선 구제도의 모순입니다. 앙시앙레즘이라고 하는 구제도는 절대 왕정, 신분제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이는 소수에 불과한 제1 신분 성직자와 제2 신분 귀족은 절대 왕정의 보호 아래 많은 토지와 고위 관직을 차지하며 면세 특권을 누렸으며, 다수를 차지하는 제3 신분 평민은 봉건적 의무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정치에 제한적이었습니다.또한 계몽 사상과 미국 혁명이 영향을 줍니다. 특히 제3 신분 중 상공업과 전문직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은 계몽사상과 미국 혁명의 영향 속에서 구제도에 대한 비판을 높였습니다.세번째로는 재정 문제입니다. 이 무렵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재정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고, 표결문제를 놓고 1,2신분과 3신분이 대립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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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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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이완용의 후손들이 아직도 잘살고있나요?
이완용은 아들은 둘이 있었습니다. 장남 이승구가 요절하여 1881년에 태어난 이항구가 유일하게 남은 아들입니다. 이항구는 이왕직 차관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으로 사채업을 했다고 합니다. 이항구의 장남이었으나 형인 이승구의 호적으로 입적하여 이완용의 장손이 된 이병길은 1937년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동요회 이사장'을 지냈고, 중일전쟁 당시 국방헌급을 헌납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습니다. 이병주는 이항구의 차남으로 1945년 6월 남작 지위을 받았으며, 광복 직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1962년 일본인으로 귀화하였습니다. 이병길의 아들 이윤형(이완용의 증손자)은 캐나다로 이주하여 1997년 정부를 상대로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낸 장본인입니다. 일부 승소 판정을 받아 30억대의 토지(서울 서대문구 일대)를 처분하여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윤형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이완용 후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다고 하네요. 특히 2005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으로 친일 행위자의 재산은 국가에 환수 처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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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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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10.19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1948년에 일어난 여수. 순천 10.19 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건의 배경은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좌절되고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발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주도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봉기하였습니다.제주 4.3 사건의 진압이 어렵게 되자 정부는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에 제주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14연대 내의 남로당 소속 장병들이 부대를 접수하고 제주 출동 거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봉기하여 여수와 인근 순천을 점령하였습니다. 정부의 진압 작전에 의해 대부분 진압되었으며, 일부 반란 세력들은 지리산 등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으로 이어갔습니다.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 과정에서 부역 행위를 구실로 많은 양민들을 희생시켰습니다. 현재까지도 여수, 순천 사건은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에서 통일 정부 수립 노력과 좌절, 그리고 이념 대립의 역사이며, 양민의 희생을 초래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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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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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근대화를 성공하고 제국 주의 루트를 타게 되었다면?
일찌기 일본은 1854년 개항을 하고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국 1868년 왕정복고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문명 개화론에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화를 이뤄냈습니다.그러나 일본은 단순히 근대화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탈아론을 내세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노선을 걸었습니다. 비록 주변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과 정책은 일본 국민들에게 고통과 한국 및 주변국에서 아픔을 줬습니다.또한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의 많은 나라는 제국주의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유럽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 벨기에도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배 과정에서 수탈과 탄압의 상처를 남겨 현재에 이릅니다.만약 우리나라도 제국주의 국가 노선을 걸었다면 국민적 고통은 물론 식민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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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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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학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던데, 학을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했을까요?
민화는 기복적 소재를 그림으로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학의 의미는 장수와 행운, 그리고 고결함의 상징합니다. 또한 학은 학식과 인품을 지닌 선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학명지사'라 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실천하는 선비를 일컫습니다.이처럼 민화에서 학은 긍정적이고,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 주며 선비를 상징하는 동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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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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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은 무엇을 계기로 발발하게 되었나요?
1차 대전 이후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엄청난 부담과 국민적 수치감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초래하였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혼란하고, 사회주의가 확산되자 이탈리아를 필두로 파시즘이 등장하였으며, 독일도 히틀러와 나치도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권력을 장악한 파시스트 정권의 당면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침략 정책을 단행하였으며,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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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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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오륜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삼강오륜이란 유교에서 지켜야 할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인륜입니다. 삼강이랑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이며, 군위신강(君爲臣綱)은 임금과 신하, 부위자강(父爲子綱)는 아버지와 자식, 부위부강(夫爲婦綱)은 남편과 아내의 법도(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륜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입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유별(夫婦有別)는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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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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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국왕은 내부에서는 황제였나요?
고려는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왕릉릉 부근에서 통천관을 쓴 왕건상이 발굴되었는데, 통천관은 황제가 쓰는 관입니다. 그리고 궁궐에서 연회가 끝나면 '풍입송'을 부르는데, 이 때 임금을 천자로 부르며, 부처와 같은 존재로 칭송하였습니다. 그외에도 고려는 국왕을 황제, 짐이라 칭하고 태자, 황후 등의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게다가 고려는 광덕, 준풍 등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는 황제국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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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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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4군 6진에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켰다는게 사실인가요??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지역 개척에 노력을 기울여 세종(1418~1450)의 재위기까지 4군⋅6진을 개척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실제 국경선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민 정책은 기본적으로 북방 변경 지역의 방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었습니다.조선 전기의 북방 사민은 세종 대 처음 시작된 후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대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를 거치면서 경상⋅전라⋅충청 3도의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당시 사민되었던 사람들의 규모는 범죄자를 제외하고도 3,733호(戶)에 이르렀습니다.그리고 세종에서 성종까지의 재위기 동안 대규모 사민 정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민 대상의 선정부터 이주, 안착, 주거지 등에 관한 철저한 계획과 지원책이 필요했습니다. 생활 환경이 열악하고, 여진 세력과의 전쟁이 거듭되었던 북방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주민들의 안착을 위해 사대부의 경우 관직에 임명하거나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 등으로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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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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