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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수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 1년으로 정하고(기원) 그 이전을 Before Christ의 약자 BC(기원전)로 표기하고, 그 이후를 라틴어 Anno Domini(주님의 해)의 약자인 AD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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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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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와 병인양요의 차이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인박해는 1866년 천주교 신자 박해입니다. 대원군은 원래 묵시적으로 천주교를 인정했던 인물입니다. 1860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러시아가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요구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 때 대원군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방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원군과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가 만남이 어렵게 되고 중국에서 영불 연합군의 살육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변하여 천주교 탄압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병인박해로 선교사 9명을 비롯해 8000여명의 신자가 순교하게 됩니다.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가 침략한 행위입니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군함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강화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격전을 벌였고, 양헌수 부대가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프랑스군은 더 견디지 못하고 약 1개월 만에 철수하였습니다. 프랑스는 물러가면서 강화도의 주요 시설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등 귀중한 문화유산과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5,000여 권의 귀중한 왕실 도서가 불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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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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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국자감에는 입학할 수 있는 신분은 어디까지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국자감은 귀족에서 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입학이 가능합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으며 유학부는 귀족의 자제, 기술학부는 중간 계층이 입학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유학부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으로 구분라여 각 3, 5, 7품이상의 자제로 입학 자격을 제한했습니다. 즉 기술학부의 율학생 · 서학생 · 산학생은 주현의 학생과 8품 이하의 아들 및 서인, 7품 이상의 아들로 원하는 자들이 입학하였습니다. 유학부는 관료 자손에 제한된 반면에 기술학부는 관료의 아들은 물론 향리의 자제, 서인까지 입학할 수 있어 입학 대상의 범주가 넓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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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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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황제국을 칭하며 천수(태조), 광덕, 준풍(광종) 등 독자적 연호는 물론 폐하, 짐(朕), 태자(太子), 황후(皇后)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황제국을 자처하며 자국을 중심으로 세계(천하)를 인식하였습니다.그러나 '금'나라에 사대, 원의 간섭으로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내려 앉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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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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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역사적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삼천궁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백제고기' 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부여 북쪽큰 바위에 후궁들이 모여 스스로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를 이끌고 떨어져 죽었다'라는 내용과 함께 바위이름을 '타사암( 정 )'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당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 역사서보다 더 많이 기록한 옆나라 대륙이나, 일본 역사서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이라도 극히 소수였을 것이며, 낙화암의 규모나 백마강의 수심 및 지형을 보아도 대규모 집단 자살은 불가능합니다.고려 말 충신 이존오가 쓴 칠언고시에, 백제 멸망 및 타사암을 가리키는 시적표협으로 '낙화암'이 등장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조선 초 성종 때 문신 김흔은 '낙화암'이라는 시를 쓰며, 처음으로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썼어요. 또다른 성종 때 문신 조위도 '부여회고 차가정운'이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언급하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조선 중기 중종 때 문신 민제인은 '백마강부'라는 시를 쓰며 '삼천궁녀'를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조선 성종 때를 거치며 타사암은 "닉화암'이 되었고, 중증 때를 거치며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기정 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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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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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영역중 독자적인 정권이 허락된 곳은 고려가 유일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몽골이 1231년 침략한 이래 28년간(1231-1259) 6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강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온 고종은 몽골에 항복 사절로 태자(훗날 원종)를 몽케 칸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몽케 칸은 당시 쓰촨성에서 남송과 싸우다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태자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황제 쟁탈전을 벌이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가운데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와 전쟁 중에 20년 이상 침략해도 무너지지 않은 고려가 제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훗날 태자의 선택은 적중했습니다. 칸 쟁탈전에서 쿠빌라이가 칸이 된것입니다. 만약 아리크부카가 칸이 되었으면 고려에게는 끔찍한 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이 때 쿠빌라이는 자신을 찾아온 태자에게 극진히 대하고, 미래를 보장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 시기는 고려의 형편대로 하라….”(<원고려기사> 1260년 6월)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고려는 원이 지나치게 간섭할 때마다 '세조구제'를 들먹입니다. 1323년(충숙왕 10년) 몽골(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설치, 사실상 흡수통합을 강행하려 합니다. 그러자 이제현(1287~1367)은 몽골 조정에 기막힌 상소문을 올립니다. “일찍이 세조(쿠빌라이) 황제께서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라 했는데…. 그런데도 성(省)을 설치하려 한다면 세조 황제의 유훈은 어찌할 것입니까. 세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며 세조의 유훈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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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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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나 중동에 내전이 많은이유?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많은 이유는 첫째 제국주의 국가들이 부족 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국경선을 나눈 게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독립 직후 중앙집권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모델의 문제입니다. 세번째로는 초기 지도자들이 부족주의를 악용하여 독재를 정당화였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부족이 무장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하면서 구테타가 빈번합니다.서아시아에서 내전이 많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가장 큽니다. 첫째 유대교 국가인 이스라엘과 주변 이슬람교 국가간의 대립입니다. 두번째로는 이슬람교 국가간 종파(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갈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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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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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우리나라의 IOC 위원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IOC 위원은 대부분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인물들입니다. 이기붕(부통령, 1955-1960), 이상백(농구인, 1960-1966), 장기영(언론인, 1967-1977), 김택수(국회의원, 1977-1983),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 1984-1985), 김운용(세계태권도연맹총재, 1986-2005), 이건희(삼성회장, 1996-2017), 박용성(두산회장, 2002-2007), 문대성(태권도선수, 선수위원, 2008-2016), 유승민(탁구, 선수위원중, 2016-2024), 이기홍(대한카누연맹, 2019~), 김재열(국제빙상경기연맹회장,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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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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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신분 변동이 어떠한 경우에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제한적이나마 지위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향리는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군인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백정도 잡과에 합격하거나 군인으로 선발되면 정호가 될 수 있었고, 외거 노비도 재산을 모아 주인에게 바치고 백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이 귀화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관리로 등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사회가 신라 골품제 사회보다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향·부곡·소가 신분 해방 운동과 대몽 항전 등에 힘입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습니다.대표적 사례로 무신정권 시기 경주의 천민 출신으로 이의민은 상장군과 최고 관직인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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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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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최초의 악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 최초의 악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 또한 분분합니다. 어떤 이는 석기시대의 독수리 뼈로 만든 피리를 최초의 악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그보다 앞선 원시 인류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에 동물 가죽을 씌운 도구를 최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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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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