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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의 왕은 황제라 칭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황제의 나라입니다. 고려 궁궐에서 발견된 용머리상에서 보듯이 고려인 스스로 황제의 나라로 자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태조는 천수, 광종은 광덕 및 준풍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왕실의 호칭도 황제의 지위에 맞게 '짐', '태자'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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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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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교훈,지혜를 다루는 책은 어떤게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양 고전 중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열전 부분만을 별도로 엮어 만든 책을 추전합니다. <사기열전>은 중국의 한무제 이전 2000여년 동안의 유명한 500여명 안팎의 인물의 삶을 통해 지혜 및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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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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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혁명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금으로 부터 1만년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점차 오릅니다. 따라서 이전과는 다르게 따뜻한 지역에 사는 토끼, 여우와 같은 작고 동물, 그리고 식물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일부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정착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게 됩니다.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구를 더욱 발전시키고, 농경과 목축을 시작합니다. 아직은 농경과 목축은 사냥과 채집의 비중에 비해 크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게 분배하여 먹고 살아야 하지만 이제는 먹이를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먹거리를 서서히 해결하게 됩니다.즉, 이와 같이 정착과 이에 따른 농경과 목축 생활의 시작은 인류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즉채집 경제에서 생산경제로의 변화입니다. 후대 학자들이 이런 변화를 산업혁명의 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고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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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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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수령과 지방관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처음 건국되고 나서는 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호족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았죠. 성종 때 처음으로 12목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종대 와서 5도 양계 체제가 정비됩니다. 그러나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이 더 많았죠. 따라서 지방관이 파견된 군, 현을 주군과 주현으로 해서 주변의 몇개의 속군, 속현, 그리고 향, 소, 부곡까지 관리하는 행정 체제입니다.결국 주군, 주현과 다르게 속군, 속현 등에서는 지역 토착 세력(호족)인 향리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들은 수령을 대신하여 향촌을 교화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직역의 대가로 외역전을 지급하였습니다. 특히 상층 향리(호장층)는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여 귀족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려 시대 향리는 향촌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녔으나, 조선 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수령)이 파견되면서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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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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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천리장성이 몽골을 막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의 침입 이후 개경에 나성과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리장성, 나성이 일시적으로 적을 막아내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고려 조정도 1232년 강화 천도를 통해 육전에 약한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한 것이죠. 그리고 1270년 개경 환도 이후 고려는 조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남송, 금과 비교하여 다행이라 할 정도이고, 오히려 자비령 이북의 동녕부,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를 직접 원이 지배하고, 영토도 축소되면서 천리장성의 의미는 없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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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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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려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유교국가로 갔는데 반면 일본은 왜 무신정권이 유지됐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1185에서 부터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막부로 이어져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막부 정치를 700년 가까이 유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는 막부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방의 다이묘를 통제했다는 것입니다. 잠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전국시대가 있었지만 에도 막부는 중앙집권적 봉건제로 할 정도로 산칸고타이 등을 통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였습니다. 두번째로는 일본의 막부 시대 국왕은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이지 실제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사스마번과 죠스번 등 존왕파의 지원이 있었기에 왕정복곡가 가능했습니다. 세번째로는 막부의 세력을 견제할 만한 외부 세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가마라쿠라 막부가 약화되었지만 새로운 막부로 대체되었습니다. 에도 막부가 약화된 것도 페리에 의한 개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반면에 고려는 1170년 무신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군사적 기반이 약해 빈번하게 권력이 변동되었습니다. 다만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등 최씨 정권은 다른 무신들에 비해 교정도감과 정방 등 정치기구와 삼별초, 도방 등을 통해 군사적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최씨정권은 몽골과의 항쟁으로 지속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최씨정권은 국왕, 백성들과 대결이 아닌 몽골과 대결하면서 약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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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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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하다보니 공민왕오른팔 신돈은 사지가잘렸다던데 왜그런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민왕의 신임으로 전권을 행사한 신돈은 권문세족에게 부담스러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민변정도감입니다. 따라서 권문세족은 끊임없이 모함했는데, 그 가운데 간통과 공민왕 시해입니다. 또한 공민왕도 신돈의 개혁을 부담스러워 했습키다. 이에 1369년(공민왕 18) 7월,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실을 알게 된 이인(李韌)은 한림거사라고 이름을 속이고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글을 써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몰래 보내면서 공민왕에 대한 역모 고변에 휘말립니다. 결국 수원에 갇혀 있다가 2년 만인 1371년 7월 사형장에서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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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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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이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양을 수도로 경복궁을 법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였습니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태종은 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짓고 머물게 됩니다. 이후 여러 왕들이 경복궁을 기피하고 이곳에 머물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광해군이 불탄 창덕궁을 먼저 복구하였습니다. 인조 반정으로 소실된 궁궐을 다시 재건하고, 후원을 만들었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곳에서 머물러 황궁이 되었습니다. 1997년 조형미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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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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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이전의 고려시대에는 왕이 힘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호족 융합 정책으로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로 인해 왕건은 29명의 아내와 34명의 자녀(왕자 25명)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이 죽고나서 왕위 계승을 놓고 왕실의 외척들 상이에 자신의 외손자가 왕으로 세우기 위해 왕위 쟁탈전이 빈번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혜종 2년(943)에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일으킵니다.따라서 고려 초기 외척과 호족들의 득세로 왕권은 미약했습니다. 광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제, 노비안검법, 공복제 등을 통해 호족 세력을 대규모 숙청하면서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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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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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양인 지배층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는 건국 초기 태조 왕건이 건국에 공신들을 역할을 기준으로 역분전을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녹읍은 관리에게 공무의 대가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조권과 지역민의 노동력 징발권을 주는 것이지만 전시과 체제가 정비되면서 사라집니다. 경종 때 처음으로 시작되는 전시과는 관리를 18과로 구분하여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습니다. 전지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의 일정량을 수취하는 수조권, 시지는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임야입니다. 물론 현직에서 물러나면 반납합니다. 그리고 녹봉은 전시과와 별도로 관리를 47과등으로 구분하여 현물로 지급하는 봉급입니다. 또한 현진 관료 이외에도 직역을 가진 사람들도 토지를 지급받았는데, 향리에게 지급된 것인 외역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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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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