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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5개의 주교가 로마주교가 대주교로서 추후 로마가톨릭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크리스트교 5대 교구란, 초기 교회의 주요 행정 구역을 가리킵니다. 5대 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입니다. 각 교구는 총대주교라는 최고 권위자를 두었으며, 그 중 로마 총대주교는 사도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다른 총대주교들보다 서열이 높았습니다.그러나 7세기 익슬람교가 확산되면서 로마와 비잔티움을 제외하고 이슬람 세계가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로마와 비잔티움 교회가 크리스트 양대 교구가 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게르만족과 제휴하고, 726년 동로마 황제의 성상 파괴령이 발표되면서 사이가 벌어집니다. 결국 1054년 양 교회는 로마카톨릭, 그리스 정교회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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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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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 이란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르텔의 어원은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의미는 "서약" 또는 "협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르텔이란 같은 업종의 기업들이 경쟁을 서로 피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합하는 행위입니다. 카르텔은 가격, 생산량, 판로 등에 대해 협정을 맺어 상품에 대해 독점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있습니다.카르텔은 기업 뿐만 아니라 정치, 국제사회, 범죄 조직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목표가 같은 사람들이 단합하는 정치 카르텔, 마약 유통의 범죄 카르텔 등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단합 행위에 대해 카르텔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자본주의 경쟁을 저해하고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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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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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조선 총독부는 무슨 일을 하던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총독부는 일본이 1910년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기관으로 만든 조직입니다. 조선 총독은 총독부의 최고 통치자로 행정, 입법, 군사권을 장악하고 일본 내각의 지휘를 거의 받지 않고, 일왕 직속의 절대군주와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총독은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8명의 현역 군인 출신으로 한국을 병영처럼 지배했습니다.총독의 아래에는 행정을 맡은 정무총감, 치안을 담당한 경무총감이 있었습니다. 총독부 청사는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하고 1926년 새로 건축되었으며, 광복직후 정부청사, 박물관으로 사용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1995년 철거하기 시작해 1996년 완전 제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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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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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원군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정명가도'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명을 칠테니 조선에 길을 빌려잘라는 것입니다. 명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선전포고입니다. 실제로 왜군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까지 진격했습니다. 조선에서 명에 원군 요청도 있었지만 자칫하다 압록강을 왜군이 넘어 진격하면 바로 요동, 명의 수도 베이징에 다다릅니다.만주에 여진이 있다라는 의미는 당시 조선과 명이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아직은 여진족이 국가체계를 갖춘 나라도 아니기에 염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조선은 명의 울타리로 명을 지키기 위해서도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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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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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백정이라는 신분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서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백(白)'은 '없다', '아니다'의 의미와 '정(丁)'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정이 아니기에 '정'이 가지고 있었던 직역이 없는 일반 백성으로 주로 군현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고 사는 농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살업자라 불리는 백정은 원래 화척, 양수척이라 불렸습니다. 북방 귀화인으로서 일반 민중과 융합되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며 특수 부락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이들은 가축 도살 및 고리 제작을 부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왜구로 가장하여 민가을 약탈하는 등 문제를 많아 백성들로 부터 배척되었습니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해 주기 위하여 백정에 편입시켰고, 일반 민중은 이들은 신백정(新白丁)이라 하였으나 종래 평민 중에서 약간 천인 축에 있던 백정보다는 양수척으로 백정에 편입된 신백정이 사회적으로 폐단이 될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이후 백정이란 명칭은 신백정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천민 신분은 사라졌으나 호적에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이라 기록하여 차별이 지속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1923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가 조직되고 사회적 차별 철폐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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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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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석벽에 있었다는 서불과차라는 글자의 뜻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의 시황제의 명을 받고 불노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서불)이 동남동녀 3000명을 대선단을 이끌고 나섰습니다.<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은 바로 금강산과 한라산, 두류산이라고 조선 신숙주는 비정하기도 합니다. 서귀포의 지명 및 정방폭포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는 오래 전부터 중국을 떠난 서복이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흔적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당시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바다로 나온 서복이 제주도에 왔고, 이곳을 지나면서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徐福過之)'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한 제주에서 불로초를 구한 서복이 '서쪽(西向)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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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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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문명의 주인공은 '하'(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 라고 하지만 실체를 명확하지 않은 반 전설적인 국가입니다. 그리고 상나라(기원전 1600~ 기원전 1046년경)도 실체가 확인된 나라로 여러 차례를 수도를 옮겨 다녔고, 화북 지방 중심으로 지배한 왕조입니다. 또한 주나라(기원전 1046년경 ~ 기원전 256년) 상나라를 대신하여 호경을 중심으로 한 왕조이지만 봉건제 체제로 실질적으로 현재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중국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수도를 뤄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춘추전국시대로 제후국들이 실질적으로 군웅할거한 시대입니다. 춘추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강남의 초, 오, 월이 중국 역사 무대에 포함되게 됩니다. 진 나라도 전국시대의 한 나라였으며, 진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직접 지방관을 파견(군현제)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황제가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결론적으로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는 실질적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통일 왕조 진(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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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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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때 4군6진으로 영토를 넓힐때 명나라는 왜 반응이 없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 조 4군 6진의 개척은 명이 아니라 여진족과의 관계입니다. 당시 명의 최 북단은 북직례성으로 요동 수도 베이징(北京)을 포함하고 있기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입니다. 청나라 때 북(北)자를 빼고 그냥 직례성이 되죠. 따라서 4군 6진은 명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으며, 여진족이 1616년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이 성립될 때까지 부족 단위로 생활했습니다.참고로 4군은 사군은 압록상 상류에 두었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을 말하며, 세종(1443) 시기 최윤덕이 개척하였습니다. 6진은 두만강 하류에 설치한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을 말하며, 1443년부터 10년에 걸쳐 김종서의 주도로 개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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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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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왕들은 왜 묘호가 없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왕 가운데 태조부터 원종까지는 묘호와 시호가 모두 있었지만 충렬왕 대부터 시호는 있으나 묘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간섭기는 원의 고려 왕실 격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충렬왕 때부터 충정왕까지의 원이 부마국으로 묘호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로 격하되었습니다. 즉 제후, 신하로서 황제만 묘호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도 사후에 원을 대신해서 명이 건국되었으며, 명에 대한 사대의 예로 우왕대 묘호가 아닌 시호만 올려 묘호가 없습니다. 우왕과 창왕은 조선을 건국한 주도자들에 의해 신돈의 자녀로 왕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역사서에도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휘)인 우와 창에 단순히 왕을 붙여 사용한 정도입니다.공양왕은 폐위된 왕으로 조선 건국초에 '공양군'이었으나 태종대 추증하여 공양왕의 시호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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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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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와 중국이 자기네 나라라 하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입니다. 먼저, 건국 세력입니다. 698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대중상와 함께 양만춘의 부하로 안시성 싸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구당서>의 기록에서도 '발해 말갈은 고구려의 별종이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두번째로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들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과 성립되었으며, 고구려의 대부분의 영토를 지배하였습니다. 세번째로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합니다. 일본의 <속일본기>에도 '우리는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째 문화적으로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발해의 온돌, 건물, 불상 등 고구려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외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항쟁(장문휴의 산둥 공격), 당의 외국인 전용 빈공과 시험 응시, 황제와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 등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으로 치부합니다. 그 근거로 발해의 백성이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갈족은 만주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로 현재는 중국 영역에 있지만 한번도 한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3성 6부 사용 등 자신들의 문화권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3성 6부 체제는 당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적인 요소이고, 수용하였지만 발해 나름의 주체적으로 변형하여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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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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