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친일파 이완용은 어떻게 죽었나요?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1909년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칼에 찔려 폐 손상을 당했는데, 흉부 외과 수술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때 입은 상처로 인해 평생 만성 폐질환과 해수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1926년 폐렴이 급격히 악회되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5.0 (1)
응원하기
유럽에 보면 오벨리스크같이 이집트 유물 및 건물들이 많던데 모두 약탈한건가요?
이집트의 오빌리시스크의 상당수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모두 약탈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당수는 정복과 제국주의 시대에 반출된 것입니다.오벨레스크가 첫번째로 유럽에 건넌간 것은 기원전 30년경 로마 초대 황제 아우쿠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오베리스크를 로마로 옮겨 제국의 권력과 승리를 기념했습니다. 이후 여러 황제들이 이집트에서 수십개의 오빌리스크를 반출하여 로마 곳곳에 세웠습니다.15세기 이후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이집트의 문화재를 약탈했습니다. 19세기에는 일부 오벨리스크가 이집트 통치자들의 우정의 상징으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콩코드 광장의 오빌리스크는 룩소르 신전 석주로 1830년대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 국왕 루리 필립에게 증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김겅희씨가 방문한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용상..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경복궁 근정전 내부에 들어간 시기는 휴궁일인 2023년 9월 12일입니다. 당시 재현품으로 파악되지만 용상에 착석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이나 영부인이 근정전 내부에 들어가 용상을 앉은 사례가 없으며 매우 이례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 조선 국왕의 즉위식이나 정무를 보는 장소로 일반 관람객은 월대 위 출입도 제한되며 내부 접근은 특별한 연구 목적 외에는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통일이 필요 없다는 의견이 50%를 넘었다고 하네요..
최근 MZ 세대를 중심으로 통일의 당위성 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M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38%, Z세대는 46%만이 통일 필요성에 공감하여 모든 세대 중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습니다.이러한 결과가 나온 배경은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의 영향, 남북관계 오랜 단절 현상 유지, 정치적 요인 등이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또한 역사 의식에 부재에서도 그렇습니다 . MZ세대는 탈물질주의적 성향이 강해 언론자유, 국민 참여, 문화적 가치 등에 더 높은 관심을 갖는 반면, 경제적 안정과 사회 질서 유지에 대한 기대감은 다소 낮을 수 있습니다. 결국, 개인주의적 성향과 함께 역사적 경험이나 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 변화, 남북관계 현상 유지 선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통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낮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식의 확산은 통일 교육의 약화된 것도 큰 비중으로 판단됩니다.
평가
응원하기
'도구지향문화'는 어떤 문화인가요?
도구지향문화는 일반적으로 조직이나 사회 내에서 도구(기술, 수단)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문화를 말합니다. 즉 도구나 기술 자체를 중요한 가치를 둔고 사용을 통해 문제 해결, 업무 수행 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며너 과업 지향 문화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성과 중심, 효율성과 생산성 중시 실용적이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둡니다. 즉 도구지향문화'는 도구나 기술 활용을 통한 현실적 목표 달성과 효율성 증대를 중시하는 문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매관매직의 경우 현재 가치로 얼마인가요?
조선 말기 고종 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본다면 종 9품인 참봉은 4250냥 정도였습니다. 1냥이 7~8만원한다면, 현재 가치로 본다면 약 8000만원 정도 거래된 것입니다. 일본 외교관의 기록에 따르면 1866년 기준으로 감사는 2만냥, 부사는 2천냥에서 5천냥, 군수나 현령은 약 천냥 정도에 걸개되었다고 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우리나라의 신탁통치 배경이 궁금해요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에 신탁통치 시행을 약속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한반도에 자국에 우호적인 성향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물론 좌익 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소련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제의했으나 미국의 요청에 의해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수용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반탁 운동의 전개의 전개와 좌우 대립의 격화되는 과정에서 모스크바 결의 대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신탁통치 시행 약속은 무효화되었으며, 한반도는 남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면서 분단되었습니다.
평가
1
정말 감사해요
100
신라 혜공왕부터 왕위쟁탈전의 시작점이라 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신라 혜공왕은 무열계 왕의 마지막 왕입니다. 무열왕 이후부터 진골 귀족들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무열계가 독점하면서 불만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전제 왕권으로 반대 위세는 약했습니다. 그러나 경덕왕 때부터 왕권이 약화되면서 불만이 표출되었으며, 혜공왕 때에는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습니다.768년년 일길찬 대공과 대렴 형제이 대규모 반란, 그후 김융의 반란, 775년에는 김은거, 염상과 정문의 연속적인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780년 김지정의 반란으로 혜공왕이 살해당하고 이후 150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왕위 쟁탈전이 일상화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엮여있나요?
로마가 물러난 이후 중세 스코틀랜드는 겔트족, 잉글랜드는 앵글롯게슨족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13세기 잉글랜드 왕 애드워드 1세가 스콜틀랜드를 예속시키려고 하면서 긴장이 심화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윌림엄과 로버트 더 부르스가 주도하여 맞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 사후 후계자가 없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두나라는 동군연합 상태되가 되었습니다. 두 나라는 법적으로 독립된 나라였지만 한명의 군주가 다스리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경제 갈등과 정치 불안으로 스코를랜드는 파탄에 이르렀고, 1707년 연합법이 통과되면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통합 이후 실질적인 권력은 잉글랜드로 집중되고 스코틀랜드는 소외감을 겪었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 내에서 자치권과 독립 요구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99년 영국 정부는 타협으로 스코틀랜드 의회와 정부를 복원시켜 내정 대부분을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스코틀랜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까지 시행되었지만 55%의 반대로 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독립의 목소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5.0 (1)
응원하기
'사초'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세요.
사초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제작된 기초 사료를 말합니다. 사관들이 왕의 참석하는 공식 행사 및 회의, 경연 등에 동행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면서 비롯됩니다. 이렇게 쓰여진 사초는 실록으로 정리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사초는 임금조차 열람할 수 없을 정도로 객관성과 진실성이 보장됩니다. 사초는 예문관 소속 사관이 공식적으로 작성한 관사초,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가장사초가 있습니다. 실록이 제작되면 세초를 통해 사초를 폐기합니다.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