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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21대 영조입니다. 조선왕조의 임금 27명의 평균수명은 47세였고, 일반인들의 경우 평균수명이 35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83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절제된 식습관입니다. 원래 왕은 하루에 5번 수라를 받았는데 이를 3번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열 두 가지가 넘는 반찬도 반으로 줄였고, 잡곡과 채식을 많이 구성한 건강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업무를 보지 않을 정도로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고도 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건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산을 좋아하여 인삼으로 만든 탕약인 건공탕을 즐겨했고, 63세 이후부터는 매일 어의에게 문진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번째로 정신건강을 위한 스트레스 관리 및 두뇌운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영조는 살아 생전 8,500편의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80세 무렵에는 한 해에만 1,000편이 넘게 썼다고 하니 노년에 드는 우울감이나 치매 증상 등을 예방하는데 좋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자기 기분을 시원하게 표출하는 스타일이라서 스트레스가 쌓일 틈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하나 자식들에게 기분에 따라 욕도 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귀 씻을 물을 가져오라 하여 씻을 정도로 괴짜였습니다.이렇듯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를 즉각 푸는 생활습관을 가진 영조가 당시의 어떤 왕보다 장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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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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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미인상은 현대와 달리 뚱뚱햇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꼭 그렇지는 않았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기준이 달랐다고 판단됩니다. 과거 미인도나 인물이 좋고 유명한 기녀들의 그림 등으로 보았을 때 미인의 기준이 뚱뚱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지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만 지금처럼 깡마른 몸매의 여자는 자식을 낳고 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예부터 골반의 모양 등을 보았으나 이것은 자손의 번창을 생각한 것이니 인물을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의 대명사인 아프로디테나 비너스 상을 보아도 풍만하지만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것으로 표현되어있습니다.원시부족들의 경우 후덕하게 살찐 모습을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라고 하여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목이 긴 것을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웃나라 중국을 보더라도 대부분 전통적으로 날씬하고 작은 사람을 미인으로 보다가 당나라 때는 좀 통통하고 살집이 있는 사람이 미인으로 인정되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이 작은 사람을 미인이라고 하여 전족이라 하여 어릴 때부터 발을 꽁꽁 싸매어 기형적으로 작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동적인 미의 기준은 아래의 몇 가지로 추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도 그것이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판단되나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것이었지 일반적으로 뚱뚱한 사람이 미인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깨끗하고 맑은 피부건강한 머릿결과 풍성한 모발얼굴의 좌우대칭뚜렷한 이목구비좋은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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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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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와 항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구와 항만이 보통 우리가 인지하기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원래의 그 명칭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으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항만 港灣 바닷가가 굽어 들어가서 선박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고, 화물 및 사람이 배로부터 육지에 오르내리기에 편리한 곳. 또는 그렇게 만든 해역(海域)항구 港口 배가 안전하게 드나들도록 강가나 바닷가에 부두 따위를 설비한 곳. 보통 기능에 따라 상항ㆍ군항ㆍ어항ㆍ공업항, 위치에 따라 해항ㆍ연안항ㆍ호항, 법제상으로 개항ㆍ자유항ㆍ중계항 따위로 나눈다[그림 출처 : 선박해양플랜트 연구소 공식블로그]위의 그림과 같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선박해양플랜트 연구소 공식블로그 [해인싸] 항구와 항만, 차이점과 종류에 대해..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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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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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중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구분은 당시 사용하던 석기를 만드는 방법의 변화로 구분합니다. 구석기 시대는 뗀석기로 돌로 바닥에 있는 바위 등 큰 돌을 쳐서 만드는 모루떼기, 망칫돌을 쥐고 만들고자 하는 돌감을 쳐서 재단하는 직접떼기, 동물을 뼈나 뿔을 정처럼 이용하여 두들겨서 재단하는 간접떼기, 뿔 등의 도구로 돌감을 눌러 긁어내어 만드는 눌러떼기가 있었습니다. 신석기 시대는 똑같이 돌을 사용하였으나 그 재단하는 방법이 정교해졌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찾아 만들고자 하는 크기로 다른 돌을 이용하여 자르고, 단단한 바닥돌에 돌감을 갈아서 날카롭게 재단하였고, 현대의 칼처럼 끝에 구멍을 뜷어 나무에 동물의 가죽이나 질긴 넝쿨로 감아 도끼처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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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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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이 정치적 모함을 겪었던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순신이 정치적인 모함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1. 이순신이 그 전공으로 칭송받으며 향후 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할까봐 원균을 필두로 그의 실책을 상소하고 폄훼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높아진 위상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처럼 행세한다고 모함했습니다.2. 이에 선조는 자신이 중요했음에도 그러한 사실을 믿을만큼 성정이 약했으며 그로 인해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그 자손들까지 보상하지 않는 옹졸함을 보였습니다. 왕이나 다른 신하들이나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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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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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이 우리나라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역사서는 어떤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은 원래 조선이라는 이름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1,500년 후에 조선이라는 국가가 같은 이름으로 건국되었기에 구분하기 위해서 옛 고자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후대에 명명하였습니다. 고조선이 언급된 국내 사서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환단고기로 통칭하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에서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으나 환단고기는 아직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위서 논쟁이 여전하기에 제외합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환단고기의 내용이 후대에 다시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 등이 중국 고서 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점 등을 제기하며 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오고 있습니다.)중국의 사서에도 고조선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 경에 제작되었다 전해지는 관자에도 고조선의 존재가 기록되어있으며, 고기, 위서, 구당서, 산해경, 사기, 한서, 정사삼국지, 후한서에도 고조선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진 고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사서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할만한 사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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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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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시 시대 일본이 우리역사를 왜곡시킨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조선은 일본을 왜라고 부르며 오랑케 취급하며 역사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 지배층이었던 이들이 식민지 하에서도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에 일본은 우리의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에 한정시키며, 자신들이 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한 당위성을 세뇌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광활한 영토를 호령했던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시켜야만 자신들이 더 대국이고 망해가는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이러한 역사에 대한 왜곡은 식민지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못하였으나, 현재에 와서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이 당시 왜곡된 역사를 배웠던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 왜곡된 역사가 진실인 것처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국의 사서 등을 연구하여 우리의 역사가 잘못되었다 문제제기하고 재조명해야 한다고 하는 사학자들을 미신이나 신봉하는 문외한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석-박사 과정에서 그러한 기존의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깨는 논문을 제출하연 석-박사가 될 수 없는 어이없는 학계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일본의 장기적인 책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웃나라로 일본과 잘 지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까지 우리의 연구와 시각이 아닌 일본이 재단해놓은 틀에 갇혀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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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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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먹는다 말이 왜 유래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떡국은 긴 가래떡을 편으로 썰어 넣고 하얗게 백탕으로 끓어 온갖 고명을 얹어 먹는 우리의 전통음식입니다. 긴 가래떡은 무병 장수를 뜻합니다. 원래 떡국은 백탕 또는 병탕이라고 불리우며, 정조차례와 세찬에 없어서는 안될 음식으로 새해나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초 설날에 떡국을 먹다보니 자연스럽게 한 살을 더 먹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다 보니 떡국과 나이가 매칭되었던 것으로 유추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병탕 몇 사발이나 먹었느냐?"라며 나이를 묻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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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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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어떤 지위와 권한을 가졌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왕의 사위인 부마는 조선 초기에는 중매 등을 통해 혼인을 하였으나, 공주와 달리 옹주의 경우 후궁의 자제라는 이유로 명망 높은 양반가에서는 고사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조선 후기부터는 간택령에 의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혼사를 거절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부마는 공주와 혼인한 경우 정 1품, 옹주와 혼인한 경우 정 2품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른 정부의 재정적 지원(집, 노비, 녹봉(월급))과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마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첩을 둘 수 없었고, 공주나 옹주와 사별한 후에도 부마의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재혼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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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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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화랑은 처음누가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시대 화랑의 공식 제도적 설치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37년(576)에 나옵니다.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화랑 사다함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그 기원을 원화(源花)가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집답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 조의선인라는 집답이 있었고, 백제에는 무절 혹은 수사, 신라에는 화랑이 존재하였듯이 과거부터 종교 및 사상과 연계되어 유사 시 국가를 위해 나서는 조직이 있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들은 어린 시절부터 애국심을 함양하고 무예와 학문을 익히는 일종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배달국에서부터 이어저 내려온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배달국을 열었던 문명집단으로 핵랑이라는 집단이 존재하는데, 중국 본토 쪽에 영토를 두고 있다가 동방의 개척에 나서게 되는데 삼신산이었던 천산, 삼위산, 금악산에서 태백산(백두산)으로 옮겨 다시 개천을 하였는데, 이 때 성직자이자 국가상비군이자 인재를 양성하는 삼랑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에서 그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후 단군조선의 국자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혹은 수사, 신라의 화랑, 그리고 고려의 재가화상(국선, 선랑)으로 각 국마다 발전되었다고 보는 설입니다. 삼성기라고 하는 사서에 그 시작이 나와있고, 태백일사라고 하는 사서에 랑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정교 분리가 되어있지 않은 시대였고, 충분히 가능성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교단사학계에서는 삼성기, 태백일사 등 소위 묶어서 환단고기라고 칭해지는 사서를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여러 내용을 보고 주변국의 사서와 비교해보았을 때 원서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내용은 진서라는 의견들이 최근 연구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말씀주신 화랑의 기원은 이러한 고대부터의 낭가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국가가 독립적으로 분리되면서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며,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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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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