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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발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질문자님의 질문 속에 예술에서 시간의 가치를 이미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아직도 생존하는 예술가의 작품은 또 다른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남아있기때문에 가치평가가 유보될 수 있죠.그러나 고인이 되신 예술가의 작품은 더 이상 그분의 독특한 예술세계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만들어 질 수 없기때문에 가치는 계속 높아질 것입니다.당연히 100년, 1,000년이 지나도 그분을 모방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아주 높아질 것입니다.그런데 문화예술발전이라는 말을 예술 작품 하나에 적용하기보다는,예술 전체의 확산으로 본다면, 발전은 확산이라는 개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류가 사냥을 하던 시절에는 예술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한 것이었겠죠.동굴 벽화를 그리는 사람을 보면서,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끼니를 잇기도 힘든데 무슨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고 비난했겠죠.그러나 한국사람이라면 이제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은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밥은 굶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예술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자아실현이 어렵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과거에는 예술이 왕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고,중인들과 상인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었죠.예술작품을 소유의 개념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이 가지는 것이었고,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술작품은 사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그러나 과학기술은 예술을 일반화시키는 기술로 발달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죠.그러니까 예술의 발전을 더 많은 대중이 예술을 감상할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죠.예술을 확산시키는 것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시민의식을 고취시키고,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는 것이므로, 예술의 확산 자체가 인류의 인문학적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NFT를 구입한 사람은 휴대폰으로만 자신이 매수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삼성과 LG는 TV를 NFT플랫폼과 연결했습니다.실물 그림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휴대폰만 아니라 TV 속에 전시하고 감상하는 것이죠.2차원의 그림이 아니라, 3차원, 또는 영상, 사운드, 그리고 입체적인 3D, 4D의 NFT를 감상하는 매체가 되도록 기술이 발전하겠죠.그렇다면, 기술 발전이라고만 할 수 없고, 예술도 발전한 것이겠죠?예술작품의 분산소유도 가능해졌죠. 예술작품의 1,000원 단위의 지분을 소유할 수도 있고,지분만큼 배당을 받기도 합니다.인류의 일상의 삶의 방식이 발전하는 것도 예술의 발전과 무관할 수 없겠죠.어 이상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동일한 효과를 스마트펜으로 테블릿에서 구현하죠.더이상 만화가 종이 위에 그려지지 않습니다.예술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품격이 떨어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방식의 삶의 양식이 발달한다면, 예술도 그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담아내기위하여 기술의 발전을 채용하게 될 것입니다.예술도 기술발전 못지 않게 발전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문 /
미술
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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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성행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과 비교해 보면 이유가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기독교(천주교)를 받아들였기때문입니다.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예수회는 당시의 과학기술과 전쟁수행방법, 군대편제를 제공했습니다.임진왜란은 예수회가 조선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기위한 이유도 있었죠.당연히 일본인들은 정부와 결합된 제국주의적 기독교를 종교로 볼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조선땅은 달랐죠.조선땅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둘 다 조선인이 스스로 실학이나 사회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수용한 것입니다.일본이 선교를 통해 전해진 기독교라고 한다면,조선의 기독교는 자생적인 것이었습니다.일본과 달리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천주교)는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조선에 100년 뒤에 들어온 기독교(개신교) 역시 조선왕실과 이후 친일 조선총독부의 박해를 받았죠.그래서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종교로 보았습니다.3.1운동이나 독립운동에도 기독교사상이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볼 수 있죠.특히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문화에서 여성은 자신의 이름조차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그저, 서울댁, 부산댁이, 누구 엄마라고 아이의 이름으로만 불려졌죠.하지만 기독교는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여성이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없는 체제 하에서교회는 이름과 직분을 붙여주었고, 여성들에게는 자아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해방이 되고 기독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합니다.대한민국 건국은 고 이승만전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고, 기독교가 정권에 부역하게 됩니다.기독교는 친일기독교와 항일기독교로 나뉘었고,한반도의 시민들은 항일운동가의 손을 들어주었죠.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설치합니다.반민특위는 친일파를 색출했죠.그런데 이승만씨는 대통령이 되려했으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기용합니다.대통령선거를 시행했으나, 표를 얻지 못하자, 이승만씨는 선거 자체를 무효로 만들고미국 군대와 친일기독교를 이용해,제주4.3, 여수순천사건을 비롯한 공산당 색출, 학살 사건을 전국적으로 일으킵니다.학살된 인원은 집계를 할 수 없으나, 수십만의 시민을 학살합니다.고 한경직목사와 서북청년단이라는 기독교 청년들은 민간인이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자격증을 받고 학살을 수행합니다.당연히 항일기독교 인사들도 수 없이 빨갱이로 몰려 암살 당합니다.이승만씨가 대통령이 된 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중에 국민보도연맹 학살(國民保導聯盟虐殺)이 자행되어 20만으로 추정되는 시민이 또 학살당합니다.학살의 경험은 한반도 땅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밤새 안녕'이 인삿말이 되죠.이후 한반도 메카시즘은 고 박정희전대통령 시절에도 계속 시민학살을 이어갑니다.역사의 아이러니죠.기독교가 항일에 앞장 섰으나, 자민족 학살에도 앞장을 섰으니 말입니다.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전두환정권에 이르기까지 친일기독교는 정권을 옹호하게 됩니다.명동성당, 김수환추기경의 이름은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리 독재정권에 희생 당하거나 고통 당한 이들의 편에 서서 보호자가 되어 시민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개신교 내에서도 좌파로 낙인 찍히지만, 정권에 맞서 시민의식을 고취시킨 소수가 존재하죠.대한민국 건국 이후, 학살의 경험은 개신교 중,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들은 극우가 되어 정권의 지원으로 한반도 기독교의 80%로 교세를 확장합니다. 비교해 보면, 외국의 장로교가 8%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한반도의 기독교는 아주 독특한 비율인 것이죠.대한기독교장로회 등 다른 교단의 교세는 한반도에서 성장하지 못하는데, 외국과 비교해 볼 때, 이렇게 된 이유는 친일기독교가 자국민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이후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대가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독점적 우위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고 박정희대통령도 친일기독교를 적극 활용했는데, 기독교의 한 부류인 '자본주의 기독교' 교리는 경제발전을 우위에 둔, 노동착취와 인권탄압의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죠.메카시즘은 물론 사대주의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있습니다.친일기독교는 메카시즘과 미국사대주의를 등에 업고 아직도 과거청산을 거부하고 있죠.한반도의 시민의식의 진보는 서서히 친일기독교의 목을 죄고 있습니다.극우 기독교는 여전히 메카시즘으로 버티지만, 시민들은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고, 친일기독교와 극우기독교의 정체성을 알아가고 있는 과정입니다.한국기독교는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만들어내었습니다.조용기목사라는 분이 삼박자 축복같은 성경이나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복적인 교리를 설파했고,한국의 기독교는 대부분 이 교리로 여의도순복음교회같은 제국을 만들고 싶어하죠.여기에는 지난 60여년간 한국경제성장도 한 몫을 했습니다.경제성장으로 현금성 전재산을 교회에 기부금으로 내었다고 해도, 10년 안에 원금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요.특히 부동산가치는 교회성장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들마다 빚을 내어 부동산을 사들이기에 급급했고, 원금을 갚는 데 1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교회들마다 대박이 났고, IMF가 오기 전까지 교회의 부동산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는 해서는 안될 불법과 탈세를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인, 종교법인으로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밝혀진 대로 어떤 단일 교회가 전국에 1,800억대가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뉴스로 접하게 되죠.미국같은 세계 각국에서 불법적인 외환유출 방법으로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코로나19바이러스 사태로 한국기독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기독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습니다.동문서답이 되어버렸는 지는 모르지만, 부디 한국 기독교가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세계 기독교사상과 교류하고,종교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학문 /
역사
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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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생겨난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는 질문자님의 말씀대로 서양의 관점에서 보는 단어입니다.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도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양의 제국주의가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기때문에 '교화'시켜야한다는 생각이 이 단어 속에 들어있다고 고발합니다.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동쪽을 뜻하지만,전쟁으로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그 전쟁의 야만성을 화려한 건축과 예술로 덮으려고 했습니다. 서양이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동양에서실크로드같은 무역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생산물과 예술, 그리고 철학을,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으로 빼앗아온 것과 동일한,열등한 식민지에서 플렌테이션으로 얻어낸 물건들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죠.그러나 서양의 전쟁사에 지친 예술가, 철학자들은 동양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꿈 꾸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이렇게 서양의 제국주의 문제를 동양적 문물과 사고방식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학자, 예술가, 철학자들,동양을 문화적으로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동양적인 것이 서양문화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합니다.서양의 이미지를 비인간적이고, 전쟁광이며, 잔인한 약탈자들로 묘사하고, 동양의 이미지는 고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깊이 있는 사상을 가진 것처럼 묘사하는 방법입니다.반면에 문명화한다는 제국주의 정당성을 위하여 동양은 진화를 거치지 않은 야만성 이미지가 되기도 했습니다.프랑스는 사르키 바트만을 박제하여 뇌와 생식기를 적출한 알몸을 박제해서 전시했죠.그녀는 넬슨 만델라와 음베카의 노력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되돌아가 2002년 묻히기까지 200년을 전시되었습니다.뇌의 크기가 서양인보다 작을 것이라는 진화의 과학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뇌를 적출했지만, 데카르트의 뇌의 크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죠.서양인의 생식기와 다른 특이한 모양에 대한 성적 환타지를 위해 생식기도 적출되었습니다.서양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학적 무지 위에 세워져 있는 지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오리엔탈리즘적 이분법적 사고는 전쟁에서 승자를 미화시킨 그리스신화에 이미 등장합니다.그리고 지금도 전쟁을 수행하는 정당성으로 사용하고 있죠.인류학은 각 민족이 가진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오랫동안 학문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이제는 세계 모든 민족 속에 들어가 함께 살면서 인류학을 완성해 오신 학자들에 의하여국제사회의 보편적 사고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죠.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도 충분히 이루어졌습니다.물론 유럽사회에서 말이죠.아직 미국은 반성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미국도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군대를 철수한 상태이고,미국시민들이 2008년 이후 시민의식이 세계시민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아프리카, 중동은 긴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으나, 미국과 가까이 있는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마지막 경제적 식민지로 남아있죠.일본은 지난 30년간 미국이 엔고강제를 요구한 결과, 경제적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다행히,우리나라는 미국의 에치슨 라인 밖에 있어서 미국정부가 깊이 관여하지 않은 덕분에,일본보다는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트럼프정부의 미국 자국이기주의 덕분에 우리나라의 종전선언이나 미군철수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네요.2022년 한반도에 서양제국주의를 사대주의하지 않고한반도가 세계시민의식을 이끄는 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해가 되기를 바래봅니다.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대로, 한국이 21세기에 세계시민사회를 이끌어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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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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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은, 사실 신전의 벽에 쓰여져 있는 말이고,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말이었을 것입니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전쟁에 3번이나 참전했던 사람으로,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인간과 국가와 법에 대하여 무한한 질문을 통해 구체적인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기를 원했는데,전쟁영웅을 그리는 신화를 통해, 정부의 입장에서는 영웅주의를 부추겨 전쟁터로 청년들을 내몰아야하는데,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전쟁에 나가는 것에 대하여 끝도 없이 회의하고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했으니,신성모독죄, 청년들을 부패시켰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내릴 만 했죠.소크라테스가 뉘우치는 자세를 취했다면,사형집행이 되지 않았을 텐데........이 사람은 악법도 법이다고 하면서 독배를 마셔버립니다.71세의 나이에 독배를 마셨네요.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대왕으로 이어지는 제자관계도 있는데소크라테스 자신은 글을 남기지 않았고그에 대한 기록은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의 기록에 남아있습니다.알렉산더는 헬라철학을 전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전쟁을 한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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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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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왜 신사의나라 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작품을 통해 젠틀맨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영국 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들과지주로 부를 축적하여 젠트리(gentry)로 불리게 된 사람들 사이에는 격차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귀족 남자가 젠트리 가문의 여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플롯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겠죠?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의 장난기 많은 상냥함에 귀족이 반하는 플롯도 시대를 역행하는 개념이고,그런데 여주인공이 귀족의 청혼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개념이 아니겠습니까?그러나 오만과 편견이 여주인공은 귀족들의 오만에 대한 편견을 벗겨내고 결국은 결혼합니다.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도 비슷한 플롯이 등장합니다.첫째 딸 캐서린은 말괄량이라고 불리고 동생 비앙카는 요조숙녀처럼 행동합니다.여기에 루첸티오가 등장하여 캐서린을 길들여 요조숙녀처럼 바꾸고 결혼한다는 이야기입니다.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말괄량이 캐서린이 루첸티오에게 길들여졌다고 결론내릴 수 없는 미묘한 결말을 남겼지만, 남성우월의식에 사로잡힌 무학평론가들은 여전히 루첸티오가 캐서린을 길들이는 측면에만 관심이 있고, 캐서린의 지혜(?)를 읽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이 부분은 제가 쓴 논문이 있지만, 그런 문학비평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그러나 질문자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국에서 쓰여진 두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오만과 편견에서 젠트리, 젠틀맨은 어떤 사회적 위치였는가를 말하려는 것이고, 젠트리가 귀족을 어떤 편견을 가지고 보았는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는 루첸티오가 캐서린에게 과격한 짓을 통해 여성을 길들이고, 신사라는 행동양식을 요구할 때, 영국사회가 어떤 행동양식을 신사적이라고 보는 지의 관점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신사의 나라"는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귀족도 아닌 것들이 귀족인 척 하려고 턱시도를 입고 돌아다니는 졸부들의 모습을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물론 우리나라에서 이 말은 아주 좋은 의미로, '레이디 퍼스트', 부드러운 말투, 상냥함, 배려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석되었죠.영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서양사회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사고에서 생겨난 오해인 셈이죠.신사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계층을 이르는 말이 어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그러나 영국사회는 제국을 확장하고, 식민지배와 전쟁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죠.산업혁명이 일어나, 당시 어린이 노동자 중에는 8~9세짜리 어린이도 있었으며, 일요일 없이 노동시간은 하루에 무려 12시간에서 16시간이나 되었습니다. 19세기 초 빈민, 고아들이 공장에 고아원시설에 팔려가거나 끌려가, 공장노동력으로 노예처럼 이용되었습니다.공장법이 최초 발의되었지만, 법에 명기된 제재는 없었기때문에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이런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 귀족층을 오만하다고 생각하였고,귀족의 입장에서는 젠트리는 경멸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젠트리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귀족들의 사회적 지도력은 서서히 젠트리들에게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에서 나온 말이 "신사의 나라", '젠트리들이 귀족행세를 하는'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학문 /
역사
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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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삶이 예술인건지 궁금합니다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답입니다^^답을 말씀하셨네요.일상이 답이지만, 일상을 아름답다고 여기려면, 일상을 잃어보아야겠죠?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전쟁터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데, 동료를 구하기 위해 불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모습이 어떻게 예술이 되겠습니까?하루 종일 일 했지만, 4인가족이 먹을 것이라곤 감자 4알밖에 없는 저녁식탁이 어떻게 예술이 되겠습니까?며칠 사투 끝에 잡은 청새치의 살점은 상어가 다 뜯어먹어 버리고, 낚싯배보다 더 큰 청새치 뼈만 동아줄에 묶여있는 채로 항구로 돌아오는 것이 어떻게 예술이 되겠습니까?복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마지막에는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칼을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어떻게 예술이겠습니까?시들어버린 장미 한 송이가 고인을 추모하며 놓여있는 것이 어떻게 아름답게 느껴지겠습니까?이 모든 장면, 그 찰나를 보고 감정이입하여 작품 속 그 과정들 속의 인간의 갈등과 욕망을 유추하기때문입니다.누구보다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게 했다면,바로 가장 잘 드러낸 그림, 연극, 소설, 시, 등 예술작품은 감상자들 모두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겠죠?물론, 감상자가 자신의 삶에서 그 비슷한 처지를 겪은 경우일 것입니다.슬픔, 고독, 배고픔, 미련이 없는 사람은 예술에서 미적 감각을 발견하기는 어렵겠죠.오히려 정교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시끄럽고 이상한 것들이 예술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간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느냐는 감상자의 삶이 어떠했느냐에 달려있는 지도 모릅니다.그러니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루하루가 스팩타클하고 너무나 어렵다면, 당신은 예술을 감상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예술작품 속에서,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미적 감각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율시켜서, 하루의 일상을 사는 모든 순간 순간에 "예~ 술이다! 이거~"라며 행복해 하시면 좋겠습니다.
학문 /
문학
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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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뭐뭐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은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햄릿이 비극인 이유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가 이미 복선으로 햄릿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으며,셰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작품에서 드라마틱 아이러니(dramatic irony)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아버지를 독살하고, 어머니를 차지한 후, 왕위에 오른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치명적 비극을 몰고 오고 있음을 독자나 관객들은 직감할 수 있죠.그리고 햄릿에서는 마지막 결투에서 독배와 칼 끝에 묻은 치명적인 독이 등장합니다.연극으로 보자면, 관객은 독배와 독이 묻은 칼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 결투를 관람하게 됩니다.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에 대부분 등장하는 드라마틱 아이러니는 관객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게 됩니다.오셀로가 비극인 이유는 이아고의 명연기에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자신이 오셀로의 질투를 부추길 것이라고 드러내놓고 알린다. 오셀로가 이아고에게 속아 아내, 데스데모나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극작가로서의 위대한 구성력을 잘 보여준다.리어왕에게는 3명의 딸이 있었다.그 중 막내 딸을 가장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된다.코델리아의 진심을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리어왕만 오해를 하고 유산을 모두 첫째와 둘째에게 줘버린다.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중에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욕망을 비극의 원인으로 삼지 않은 작품이다.개선장군이었던 맥베스는 함께 싸웠던 뱅코의 자녀가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속삭임에 넘어간다.이 작품의 드라마틱 아이러니는 마녀를 만나는 것.관객들은 맥베스에게 감정이입되어 마녀의 3가지 예언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악인 맥베스를 응원하게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빠른 전개가 진행되어,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맥베스인 것처럼 느끼도록 구성된 작품이다.
학문 /
음악
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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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한국 철학자는 누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양철학사와 동양철학사를 원조로 구분한다면,서양철학은 그리스 플라톤이 남긴 기록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겠죠.서양철학은 여전히 이원론, 즉 영원한 세계와 물질계로 구분하는 플라톤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서양철학은 제국주의라고 부정적으로 폄하할 수도 있는데,끝도 없는 전쟁으로 승자와 패자의 관점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동양철학은 가까운 중국, 그리고 인도와 페르시아, 더 나아가 아프리카대륙의 신앙과 관련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신앙이라는 것은 현실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데요.한반도 땅에서 발생한 철학이라고 한다면,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언급하는, 환인이 환웅에게 태백에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시행하도록 했다고 하는 사상은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일연은 몽고의 침략으로 한반도가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민족의 근원을 환인에게 두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시민정신을 고취시켰다고 할 수 있겠죠.한반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최치원이라는 이름과 그의 남긴 기록이 있지만, 그는 화랑이나, 풍류를 언급할 때, 도교의 신선사상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불교는 전쟁을 600번이나 겪은 한반도에서 호국불교로 변했고, 이에 기여했던 승려들도 한반도의 철학사상에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원효대사나 의상같은 분들의 이름이 남아있죠.한반도지역에 철학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끼친 사람은 정도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삼봉 정도전은 경국대전에 남긴 기록으로 보면, 왕권을 견제하고 재상에게 정치권을 맡기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토지제도개혁도 주장했는데, 민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그가 쓴 불씨잡변에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습니까?라는 스님의 질문에,"군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라는 답변을 남겨, 술수에 미혹되지 않도록 분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성리학의 현실참여 정치사상으로 민중의 의지를 꺾는 혹세무민, 권모술수에 반대했다고 볼 수 있겠죠.정도전의 사상은 여전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시민정신의 근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성호 이익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과거제도의 혁신과 양반중심의 관직제도가 아닌 생업을 중시해야한다고 주장하죠.덕치도 중요하지만, 엄격한 법 시행과 법률 적용 방법의 형평성을 논했습니다.다산 정약용은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유학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당시 100% 사대부에게 독점된 토지를 무상분배, 공동 노동과 공동 분배를 주장하여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애민 국가, 애민 사회를 주장하여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정약용의 수원 화성 건축을 위해 거중기를 고안한 이야기도 유명하죠.그가 쓴 책, 목민심서도 유명하기는 마찬가지이고요. 손병희의 인내천 사상도 한국철학의 맥을 잇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일본의 식민지배와 이후 미국 군정 하의 대한민국 건국으로 현대 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가장 한국적인 철학이라는 것이 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조심스럽게 ^^방탄소년단의 유엔연설을 보면서, 가장 한국적인 철학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한류의 바탕이 되는 것이 한국철학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철학적인 사상적 배경이 없다면, 한 때의 이벤트가 되겠지만, 철학이 담겨있고, 가장 한국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전세계의 시민들은 그리스철학으로 시작된 서양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널리 사람과 천지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고조선건국이념을 받아들이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함께 걷자고 동의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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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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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특히 철학적으로 발전한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만약에 말입니다.대한민국이 현재 전세계 패권국가가 되었다면, 배달민족, 인내천사상, 금속활자, 원효, 이황, 이이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이어받아 학문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일본과 중국을 거쳐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동, 인도로 가서 제국의 패권을 가지고 학교를 세우고 종주국 한반도를 추종하는 인문학과 예술을 하도록 이끌지 않았을까요?한반도와 거의 유사한 지리적 환경을 가진 곳이 그리스이고,서구 유럽이 세계 패권을 쥐었기때문에, 일단 한반도의 철학은 주류에 들지 못하고요 ㅠㅠ그리스인류가 상형문자를 표의문자로 전환한 곳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수메르문명으로 보입니다. 토판에 글을 새기고 도서관을 운용한 제국이었죠.히타이트인들이 인류 최초로 철기문명을 일으켰다고 보는데,청동기 무기와 철기 무기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이 무기의 힘이 제국확장을 계속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히타이트족이 철기 기술만 가졌을 뿐, 제국을 스스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현재의 터키,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철기를 전해주고 히타이트는 소멸합니다.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메소포타미아는 제국확장을 위한 전쟁만 끊임없이 일삼았던 반면,그리스는 철기문명을 해상무역에 집중시킵니다.한반도주변으로 생각해 본다면, 중국 본토가 끝도 없는 중원의 전쟁을 일삼을 때, 한반도는 해상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교역을 확대했죠.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는 해상무역을 통해 교역의 기술 중 수학, 측량, 가치평가, 화폐단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 변하지 않는 진리, 천문학, 우주와 존재의 창조의 근원, 신 개념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가졌던 것이죠.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했고,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했습니다.자신도 3번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에게 끝없는 질문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라고 했고요.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이데아가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원인이라고 했는데, 인류의 철학적 논의가 시작된 출발점이 그의 가르침과 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생각은 세계 패권을 장악한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동양 철학은 20세기 들어서야 깊이 연구되고 있죠.어쨌든, 부유해진 상인들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적 결정방식이 그리스지역에서 채택됩니다.현재 터키와 시리아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제국과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제국은 그리스의 부를 약탈하고 싶어지겠죠?그래서 그 먼 길의 원정에 나섭니다.페르시아군대는 용병이고, 그리스지역의 군대는 시민군이었죠.그리스지역의 시민군은 자발적으로 자국을 지키기위해 군인이 된 사람들이었기때문에, 숫적으로 몇 배가 넘는 페르시아군대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당연히 전쟁은 영웅을 낳게 마련이고,이렇게 전쟁 영웅을 칭송하는 신화와 사상이 전파됩니다.전쟁으로 희생당하는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어른들이 있었고,전쟁으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전쟁영웅으로 부와 명성을 쫓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대왕의 스승으로 유명하죠.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어와 그리스문명, 그리스철학, 그리스식 통치방식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헬레니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했던 그리스문명 전파는로마가 그리스를 침략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사실 로마는 문명이라는 것이 없었기때문에 그리스문명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로마의 패권은 문명으로 보면, 그리스문명 패권이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결국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했지만, 철학과 예술은 그리스에게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우리나라 역시 일본과 중국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한반도를 침략한 후에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것이 철학과 예술의 차이였다고 보입니다. 한반도를 군사력으로 삼키는 것은 곧 철학과 예술에서 한반도에 흡수될 수 밖에 없기때문에 뱉어내거나, 아니면 한반도문명으로 침략국의 문명을 바꾼 로마처럼 해야했을 것입니다.어찌되었건, 그리스라는 나라는 지증학적으로 반도에 있어서 무역일 발달하고, 그 풍요를 누리면서 철학이 발달했고, 발달한 철학이 침략국의 문화를 흡수해버렸고, 로마 이후 서구 유럽이 세계 패권을 쥐면서, 그리스철학이라는 것이 인류의 최고 지성처럼 홍보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쓰다 보니, 너무 길게 썼네요.한반도가 중국, 일본, 동남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타고 전세계 인문철학의 패권을 , 키보드 입력 언어로 한글이 전세계에서 채택되는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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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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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예술의나라로 유명한 이유는 뭐죠?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스라는 이름이 쓰여지는 이유는 프랑크왕국이 분열하면서일 것입니다.동프랑크(현재 독일), 서프랑크(현재 프랑스), 중프랑크(현재 이탈리아)로 나뉘고,영국과 백년전쟁을 겪고,1494년부터 1559년까지이탈리아와 전쟁을 계속했고,이 전쟁기간동안 이탈리아로부터 예술이 프랑스로 약탈된 것이죠.1562년부터 1598년까지위그노전쟁,1618년부터 1648년까지30년 전쟁으로 164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항복을, 1659년에 스페인의 항복을 받아내죠.전쟁을 통해 확장하는 프랑스는 루이14세라는 유명한(?) 왕의 통치 아래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합니다.물론 루이14세의 재위 기간 72년 4개월 중 31년 동안 끝도 없는 전쟁을 통해 영토확장, 식민지배, 식민착취를 이어갑니다.이 때 프랑스 보병은 당대의 세계 최초의 근대화 군사력을 갖게 되죠.이 시기에 프랑스에는 공립 예술학교들이 줄줄이 세워지게 됩니다.오히려 발달하는 문화는 루소,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계몽주의자들의 활동이 가능했고, 그 결과는,프랑스대혁명으로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죠.혁명정부의 무능은 다시 나폴레옹을 탄생시킵니다.그 이후 나폴레옹의 실각, 왕정복고, 나폴레옹황제 즉위, 프로이센전쟁 패배, 프랑스 제3공화정제로 뒤죽박죽이 된 역사는독일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는 세계1차대전까지 이어지죠.프랑스가 승전국이 되고, 독일이 패전국이 되었다가,제2차세계대전으로 프랑스는 독일에게 짓밟히게 됩니다.프랑스 예술은 전쟁의 결과물이죠.15세기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된 르네상스가 전쟁으로 획득한 부를 예술발전에 쏟아부으면서, 문화예술 운동을 가속화시킵니다. 끝도 없는 전쟁 중에 프랑스인들도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탈취해 온 예술을 통해, 삶에 대한 갈구, 인간에 대한 연구, 인간성에 대한 보편적 지식, 자유에 대한 갈망, 인간이 갖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추구합니다.르네상스사상이 유럽에서 가장 발달하게 된 원인이 프랑스가 오랜 전쟁을 치렀기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이 시기 프랑스는 프랑수아1세와 앙리2세같은 왕들이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화가, 조각가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프랑수아 1세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같은 이탈리아 예술가를 프랑스로 망명시켰습니다.금세공, 벤베누코 첼리니, 화가, 줄리오 로마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에게 왕실을 치장하게 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중개상을 통해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의 그림을 프랑스로 사들였습니다. 최후의 만찬도 프랑스왕실로 옮겼죠.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었습니다. 16세기에는 그 유명한 메디치가문도 피렌체에서 프랑스로 옮기죠.프랑스에는 몽테뉴가 있습니다. 그는 1인칭 문학의 창시자로, '수상록'을 발표한 사람이죠.이 시기에 프랑스에는 '살롱'이 탄생하고, 문학과 예술에 관한 대화가 끊이지 않는 공간이 마련됩니다.그러나 무엇보다 프랑스 예술은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예술품, 예술가를 약탈(?)해 왔기때문에 가능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또한 프랑스 정치권의 예술지원정책도 적절했다고 볼 수 있죠.전세계 모든 예술품을 사들일 재력을 보유하기도 했고요.루브르박물관의 수많은 소장품들이 식민지나 패전국들로부터 약탈해간 것이기 때문에 ‘거대한 약탈 전시관’이니 ‘문화제국주의의 신전’이니 하는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죠.우리나라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협상도 있었죠.루이14세가 직접 발레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프랑스의 지폐에는 음악가의 초상이 들어있죠.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시작했죠.대통령제까지 다양한 정치실험이 어떤 나라보다 먼저 일어났고,그래서 탈권위의 예술이 가장 먼저 실험되었습니다.음악, 소설, 철학, 미술, 조각, 건축, 디자인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인들은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졌습니다.코로나19에도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이유는 전쟁 중에 페스트를 경험했었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그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스러운 표현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시민들의 의식이 강하게 예술에 표현되고 있기때문에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라고 불릴 것입니다.프랑스는 예술이라고 하면, 그 어떤 것도 허용이 되는 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도 예술과 문화 컨텐츠를 지난 수십년간 발전시켜왔는데, 그 배경에는 역시 경제발전과 국가적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의식의 발전이 중요했다고 볼 수 있겠죠.
학문 /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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