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종친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친들은 권력에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종친은 잘못 나서면 역모에 가담한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기 쉽기에 종친들은 정치는 멀리하고 그들의 생활은 왕의 사사로운 재물인 내탕금등으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종친이 물론 정치에 간혹 간섭 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양녕 대군 입니다. 양녕 대군은 세종의 형으로서 세종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그 이후에도 단종, 세조 대에 까지 왕들의 숙부로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 했다고 합니다. 좀 특이한 경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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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도전의 가장 큰 업적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 한 것 입니다. 물론 이과정에서 불교를 아주 혐오하는 < 불씨 잡변> 등과 같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경국전을 써서 조선 시대의 법률적 체계를 잡기도 했습니다. 또한 재상 정치를 강조해 왕권 위주의 정치 보다는 재상및 신하가 이끌어 가는 나라라는 당시에는 약간 획기적인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기 민주정치, 재상 정치에 대한 생각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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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전염병이 생기면 통행을 금지시켰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세종 떄에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있습니다.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고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전해 집니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종은 왕임에도 전염병 발생시 백성들을 격리 하는 등 질병 관리 대책 본부장 같은 일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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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밀사는 헤이그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나 참가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 당하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자결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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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정치 관련 책에 대해 질문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진.남북조 >분열과 역동의 시대, 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 12, 라는 책이 아마다 당시 중국의 정치등관련 한 책이라고 보여 집니다. 혹은 <중국의 역사(위진남북조)> 라는 가와카스 요시오 저자(글) 임대희 번역 도 있으니 인터넷에서 미리 한번 검색 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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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노비가 많을 시기에는 전체 인구의 약 40%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국가에서는 노비의 숫자를 줄이고 양인들의 숫자를 늘려야 세금도 많이 걷을 수 있기에 노비를 줄이고자 했고 귀족, 양반들의 입장에서는 노비들이 많아야 자기들이 편하기에 노비를 늘리고자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약 1200만명 정도로 본다면 그중 40% 인 약 400-500만명 정도가 노비 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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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과 말갈족은 어떻게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골(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으로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골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됩니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鮮卑族)이 우문(宇文)·해(奚)·거란으로 나뉘어 송막(松漠) 지방으로 피신한 4세기 전반부터 비로소 사서(史書)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변 집단에 대한 약탈과 방어의 필요가 있을 때만 서로 잠정적으로 동맹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초 부족적(超部族的)인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말갈족은 여진족과 동류(同類), 전신(前身)이며 이전 여진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사실 말갈족과 여진족은 같은 계열 입니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은 말갈을 통틀어 여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말갈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한반도 남부 강원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초기부터 고구려 한민족에 정복되어 오랜 시기 한민족에 동화되었고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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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에서의 1차 베이비 붐 세대 는 1953년 ~ 1959년 생 까지고, 일반적 외국에서의 베이비 붐 세대 는 1945년 ~ 1955년 생 까지 입니다. 우리 나라는 남북간의 6.25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많이 줄었고 전쟁 후에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찾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기 시작 합니다. 그것이 1953년 부터의 1차 베이비 붐 세대의 이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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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실각하고 죽게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다피 정권은 혁명 정신에 어긋나는 반대자나 비판자를 제거하면서 40년간 정권을 유지 해옵니다. 국내 거주 인사는 물론 해외 거주 리비아인들까지 처단 대상에 포함하는데 명색이 대중참여 정치이기에 정당은 불법입니다. 언론이라고는 官制(관제)언론뿐 입니다. 당연히 노동조합이나 NGO도 없고 비판적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카다피가 4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혁명 이전과 비교해서 혁명 이후 리비아의 생활수준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인데 독립하던 해인 1951년 리비아는 세계 最貧國(최빈국) 중 하나로 국민소득이 1인당 25달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1만4000달러에 이르는 이유는 석유의 힘입니다. 문제는 이상은 높은데 카다피의 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차분하고 치밀한 과정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카다피는 꿈은 아름다우나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기에 결국 반란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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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대학교가 파산한 이유가 뭐죠?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국제대는 부실 경영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장이 미납된 공과금과 체불 임금이 100억원을 넘어서는 등 재정난이 장기화하자 최근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1978년 진주여자전문학교로 개교한 한국국제대는 이후 성장을 거듭하며 2003년 입학정원 1265명의 4년제 대학으로 출범했던 학교 입니다. 불과 20년 만에 폐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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