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민요조 서정시는 어떤 특징이 있는 시를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소월과 홍사용의 시를 통하여 민요시의 개념을 전통적인 민요조에 기반을 둔, 곱고도 설은 정조를, 아름답게 짜고 엮어서 만든 고운 조화를 이룬 시라고 설명하고 하는데 이런 특질은 민요조라는 특성과 더불어 서정시라는 특징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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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영국에서 유행한 고딕 소설 장르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딕 소설 장르 라는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영국에서 유행한 소설입니다. 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된 성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따위의 기괴한 사건을 주로 다루면서 신비감과 공포감을 나타냈는데 월폴의 〈오트란토성〉, 래드클리프의 〈우돌포의 신비〉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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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영어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 영어에 관해서만 따로 마든 박물관은 없습니다. 다만, 파주 영어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외국어 공교육을 보완하고 외국에 어학 연수를 가지 않아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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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들은 몇살부터 화랑이 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랑도는 낭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합하였으며 조국 수호, 나아가서는 이상 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 기간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구성원 사이의 인적 결합은 매우 긴밀하였고 낭도는 대체로 14∼18세로 구성되었는데 자격 조건에 대한 특별한 시험을 봐서 선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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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시작시 선전포고를 해야한다는 규칙은 언제 어디서 정해졌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전포고는 유럽 쪽에서 시작되었고 정례화된 방식이다. 유래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아니지만 중세 봉건시대에 기사나 영주들이 상대와 싸우기 전에 결투 신청 내지는 도전장을 날리던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것이 봉건 시대 이후 외교적으로 정례화되면서 자리 잡았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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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국방에 의무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평시에도 16세부터 60세까지 모든 남자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여하는 국민개병주의 체제로 발전하였는데, 일부에서는 병역의무를 면제해 주는 대신 삼베나 무명을 납부 하는 군포제 (軍布制)를 실시하다가, 이로 인한 백성의 부담이 크다 하여 종래 납부하던 군포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그 부족분을 어업세ㆍ소금세ㆍ선박세 등으로 보충한 균역제 (均役制)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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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은 어떤 업적을 남기셨는지 알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엔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외교의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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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고을의 수령은 법을 어떻게 알고 재판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령 (守令)은 군수 (郡守)와 현령 (縣令)의 준말로 한 고을의 행정·사법·재정·군정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고을을 통치하는 사람으로 목민관 (牧民官) 등으로 불리며 역대로 그 역할이 중요 했는데 이렇게 당시 수령은 지금의 경찰서장 역할 뿐 아니라 판사의 역할을 할 정도로 경국 대전 등을 공부하고 그 내용 또한 숙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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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참전한 전투 중 가장 성과가 좋았던 전투는 어떤 전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합니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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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후궁인 빈은 그 수에 제한이 없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왕 가운데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태종으로 19명을 두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14명, 성종이 13명, 고종이 12명, 연산군과 중종은 11명, 정종은 8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볼 떼 조선 시대 후궁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고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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