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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대하는 우리에 태도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지의 내용은 거의 다가 소설 입니다. 하지만 그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 다고 합니다. 가령 보통 유비의 관용적인 리더십과 조조의 다소 난폭하지만 추진력있는 리더십을 비교하곤 하고 부하의 입장에서 유비만 한 상사를 만나는 것은 참 행운이겠지만, 가끔 너무 의를 챙기다가 답답하게 행동할 때가 있었다고 느끼기도 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이 가장 인상깊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돌아 보며 현재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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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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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진사라는 호칭은 어떤 벼슬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에 진사는 한동안 과거 시험인 진사과의 급제자를 뜻하며 관리에 임용되었으나, 조선시대 진사는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小科) 진사 시 합격자를 뜻하는 의미로 격하 됩니다. 조선에서는 소과 과거시험인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의 직역이 '진사'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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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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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선 어느 시절부터 화약 무기가 들어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화약에 관한 기록은 고려 시대인 12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중엽인 숙종 9년(1104년)에 여진 정벌을 위해 설치한 별무반 중에 발화(發火) 부대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어 인종 13년(1135년)에는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포를 사용하여 성루를 부수고 화구(火丘)를 던져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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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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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화폐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에도 화폐가 있었습니다. 바로 ‘건원중보’는 원래 당나라 숙종 건원연간(乾元年間)에 주조, 발행된 화폐인데, 고려는 이를 모방하여 앞면에는 ‘乾元重寶’라는 화폐명을 새기고, 뒷면에는 ‘東國’이라는 글자를 표기한 고려의 건원중보를 주조하였다고 합니다. 건원중보 철전은 996년(성종 15)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이듬해에 발행되었는데 그 뒤 1002년(목종 5)까지 계속 유통되었으나, 이해에 이르러 목종의 교지에 의해 유통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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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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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휴일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 주일인 일요일 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95년 4월부터였으며 그 이전에는 일요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신에 매월 1일, 7일, 15일, 23일, 절기가 드는 날 (입춘, 경칩 등)은 정기휴일이었는데 국정 공휴일은 설날 7일, 대보름과 단오 그리고 연등회에 3일, 추석에는 하루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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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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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귀주대첩에서 검차는 실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의 기병을 공격 하거나 방어 하기 위한 최첨단 장비가 바로 검차 였다고 합니다. 검차는 길이가 약 2.7미터 정도 되고 한 수레에 약 25명의 군인들이 붙어서 한 조를 이루었던 장비 이고 이 장비 덕에 거란의 기병대가 많은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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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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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무사는 얼마나 부자였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사 무사는 1324년에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로 대대적인 성지 순례를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순례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화려한 행렬이었는데, 만사 무사와 만사 무사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개인적인 시종 500명이 순례에 따랐을 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과 귀족들도 행렬에 합세했는데 60,000명의 시민들과 황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든 500명의 전령이 행렬의 앞에 서고 그 뒤를 12,000명의 노예가 따랐는데, 노예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커다란 황금 주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600마리의 ㅏ낙타가 한 마리 당 100kg이 넘는 사금과 황금 덩어리를 짊어지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으며, 이 어마어마한 행렬이 소비할 식량을 짊어진 낙타 무리도 당연히 행렬에 함께 했다고 합니다.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순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 만사 무사가 순례하면서 가져간 금만 해도 약 142톤, 현재 가치로 약 55억 달러(약 7.2조 원)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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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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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시대는 왜 저문걸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한 후 영국에 대한 군사적 공략을 접고 대불동맹의 주도국인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굴복시키기 위해서 취한 정책이 대륙 봉쇄령인데 아울러 프랑스의 대륙시장 점유율을 확대하여 대륙의 경제를 지배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해 나폴레옹은 점차 그 세력을 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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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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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토히로부미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따라서 전통적으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받는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평가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당장 NHK 군사 칸베어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일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으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입지전적인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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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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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광해군을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잘한점을 꼽자면 우선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하였으며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가 잘한점이라고 할수 있고 반면 잦은 옥사와 중립외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은 잘못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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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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