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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4.03.11

도첩제는 무슨이유로 만든 제도 인가요?

조선초에 도첩제를 시행했다고 합니다.

도첩체는 국역을 면제하는 승려의 신분을 보장하는 제도인데 승유억불 정책을 쓰는 조선시대에 왜 도첩제를 시행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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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첩제는 아시다시피 고려후기 부터 조선 중기까지 승려의 출가를 인정해주던 제도 입니다. 승려의 자격증 같은 제도 였습니다. 이러한 도첩제를 실시한 이유는 출가자의 경우 군역을 면제해 줬는데 출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출자가 인척 군세, 군역을 면제받던 사람이 증가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도첩제를 실시하여 출가자를 관리함으로써 국가의 세금 및 군복무에서 발생하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답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추가로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달아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신장하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게 한 후 도첩을 주는 방식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그 후 조선 성종 때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부터 승려가 출가 할때 국가에서 그 신분을 인증해주던 제도로 조선 초기에 강화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예조에서 도첩을 발급, 승려가 죽거나 환속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은 억불숭유 정책을 표방하면서 일반 양인들이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는데 양인의 승려화는 농민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조세 수입 감소로 인한 재정의 약화를 초래하고 보다 근본적으로 불교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숭유억불을 주창하는 조선의 정책과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군역에 충당해야 할 양인이 승려화 되면서 군역이 감소되는 부정적 요소도 차단할 필요가 있어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자 하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도첩제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당나라 때 제도화 되었던 것을 고려 말 도입한 것으로 이후 조선 태조때 강화되어 승려가 되려고 하는 자는 양반의 경우 포 100필, 양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바치도록했으며 세조 때 교종과 선종 본산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포 30필을 바치는 자에게 승려가 되도록했습니다.

    세조 때 실시한 승려 신분증 제도인 도첩제는 고려 시대는 불교 국가로 승려의 수가 매우 많았으나 조선 초 아직 왕권이 확립되기 전 이들 모두 양민으로 만들면 반란 등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우려해 세조 때 승려 신분증을 만들어 극히 소수만 승려로 인정해주고 대다수는 양민으로 만든 정책입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첩을 받지 않으면 승려가 아니다

    +

    도첩은 조정에서만 만들 수 있다

    = 조정에서 승려가 몇명인지 조절할 수 있다

    입니다.

    그리고 승려의 군역 면제는, 물론 매력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승려는 사회의 일원이 아니다" 라는

    기수열외에 가까운 취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