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젠에서는 얄리얄리댄스라는 전통 춤이 있다는데,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진 춤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약 1만2000년 전에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얄리얄리 춤'이라고 하는데, 사냥에서 많은 동물을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춤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아제르 바이젠 사람들이 이 전통춤을 출 떄 " 얄리 알리" 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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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한국 영역이었던 역사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마도가 조선 땅이었음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엄연히 나와 있다고 합니다. 조선이 형편없이 깨진 임진왜란 당시에도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대마도 동편의 바다를 조선해(朝鮮海)로 불렀고, 일본 또한 그리 불렀다고 합니다. 그랬지만 구한말 고종 시대에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 일본은 강화도조약 직후인 1877년 ‘대마번’을 나가사키현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대마도주에게 백작 벼슬이라는 당근을 주고 아예 일본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대마도가 지방 호족의 개인 소유지가 아니라 일본의 국유지가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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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12신의 몰락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그리스 종교(Ancient Greek religion)는 고대 그리이스(기원전 1100년경~기원전 146년)에서 신앙 되고 실천되었던 믿음들과 의식들을 통칭하는데, 여기에는 대중적인 공공의 종교들과 이들과는 차이가 있는 컬트 종교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리이스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많은 다신교적 복수의 신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대신 하나의 지고한 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는 이 지고한 신을 善의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선의 이데아, 즉 神은 우주의 모든 완전들, 즉 이데아들의 총합이며 우주 속에 여러 완전들, 즉 이데아들을 출발하는 존재라고 믿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또한 다신교적 복수의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신교적 복수의 신들에 대한 경험적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그리이스 철학자들 이후에 그리이스 신화는 그냥 신화 일뿐 더이상 절대적인 종교 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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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실제로 권한이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는 품계분류상 관찰사와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고 합니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암행어사는 서계(書啓 : 보고서)와 별단(別單 : 부속 문서)을 국왕에게 제출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정2품의 벼슬이며 지금으로 따지면 도지사와 같은 직책 입니다. 지방관들도 암행 어사라는 직책이 임금이 직접 보낸 관찰사 급에 해당하는 특별 감시관이라고는 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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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결국 요동성을 차지했나요? 차지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실제 영토가 어느 정도를 알기 위한 구당성'과 '유취국사' 라는 책에는 발해 영역이 사방 2천리에 이른다고 하였고, '신당서' 에는 사방 5천리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방 2천리라고 한다면 고구려의 최대 판도보다 작고, 신라의 최대 판도보다 약간 크게 되는데 발해의 전성기에는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성도 회복을 했다가 나중에 내어 주게 된다고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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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페라라는 장르는 어떻게 형성이 된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팝페라 함은 팝 (pop)과 오페라 (opera)의 합성어로,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음악 스타일 또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킵니다. 당초 오페라 아리아 를 팝 스타일로 편곡 해 부르는 작업을 가리키는 말로 1997년 <워싱턴포스트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음악 장르로까지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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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르지못하는 왕자들은 궁에 거주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의 직속 형제들은 대군이라하고 왕과 동렬이면서 후궁의 형제들은 그냥 군이라고 합니다. 대군이나 군들은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면 출궁을 해서 궁밖에서 집을 얻어 생활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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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복권은 언제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육신에 대한 추숭은 숙종 17년에 와서야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능행에서 돌아오면서 노량진을 지나다가 육신의 무덤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성삼문 등 육신을 복관(復官)하고, 무덤 가까이 건립되어 있던 육신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명령이 내려가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찬반의 논란이 벌어졌는데, 결국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이 명령은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으로 대표 되는 사람들 중 박팽년을 예를 들며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본인, 형제로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박팽년의 아들 박헌(朴憲)·박순(朴詢)도 죽임을 당하였고 박분(朴苯)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가 없는 경우에는 그 외손이 제사를 같이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외척들도 거의다 노비가 된 경우에는 제사 조차도 한동안은 드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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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왕자나 공주가 죽으면 장례는 어떻게 치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치르는 국장보다 한 단계 아래인 예장은 세자와 세자빈, 왕비의 부모, 빈과 귀인, 대군, ·왕자군(王子君) 및 그 부인, 공주, 의빈 , 종친 종2품 이상, 문무관 종1품 이상, 공신 등의 장례를 가리키는 말로, 국왕과 왕비의 장례인 국장)보다 한 등급 아래였는데 예장도감은 이와 같은 예장의 준비와 진행을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 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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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패는 언제부터 부여받을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부 했는데 호패는 왕실·조관 (朝官)으로부터 서민 (庶民)·공사천 (公私賤)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사용하였는데 그 재료와 기재 내용은 신분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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