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물가지수가 3%대에 이르렀는데도 미국에서 금리를 계속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미국이 계속적으로 금리를 인상 하는 이유는 대규모 재정 확대로 성장 및 물가 전망이 상향 조정된 데다 향후 성장 경로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국채 발행 확대로 수급 부담이 가중된 데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금번 재정확대가 막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일회적 성격의 이전지출인 만큼 명목중립금리나 장기 기대 인플레이션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시장 참가자들은 최근 금리 움직임을 저금리 기조의 변화라기보다는 경기순환적 상승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분석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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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때 연합군 쪽으로 승기가 기운 전환점은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독일군을 확실하게 누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하게 됩니다. 상륙 후 전선은 한동안 교착 상태가 이어졌으나 독일군의 방어선은 일단 구멍이 뚫린 다음엔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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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시기에 제주도가 원에 편입되었던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닙니다. 고려말 까지도 제주조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 초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 한 이후 조선에 복속 됩니다. 그러니 고려 시대 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그러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제주도 까지 가서 원나라와 항쟁을 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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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제란 무엇이며 적용하고 있는 국내기업에 사례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사외이사(社外理事)는 회사의 경영진에 속하지 않는 이사입니다. 대주주와 관련없는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인데 이사로서 상무에 종사하지 않는 자로 정의되거나 비상임이사라고 지칭되기도 하며, 업무집행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 유무에 의해 사내이사와 구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외이사는 회사의 피고용인은 아니며 이사회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회사 집행 관리자인 사내 이사와는 구별됩니다. 보통 이들은 경영자 입니다. 사외이사제도는 경영진과 최대주주로부터 독립되어 회사 상무에 종사하지 않는 이사를 이사회 구성원으로 선임해서 회사의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감시토록 하는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입니다. 1997년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기업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였습니다. 1997년 와환 위기 이후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제도 개선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로 도입된 것이 사외이사제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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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이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 왕후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궁인 공빈 김씨의 큰아들이 임해군 인데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 하고 인진왜란 발생 당시에도 왜군에게 잡혔다가 풀려 나는등 모가나는 행동을 보이다가 결국 왕이 되 지 못하고 둘째인 공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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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간 차용증 작성 시 내용증명도 반드시 해야할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는 특수 관계인이라고 하는데, 국세청은 특수관계인간 금전 대여를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만약 의심을 받게될 경우 빌린 게 맞다는 것을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동산 투자를 할 때도 집 값이 많이 오르다보니 부모/친척/형제의 자금을 빌려 충당하는 경우가 있는데요,자금 조달계획서 내 차입금 비중이 크다면 충분히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이 돈은 빌린 것이고 추후 잘 갚을 겁니다" 라고 판단할만한 근거를 미리 알고 준비해 놓는 것이 필요하겠죠. 이럴떄를 대비해서는 아무리 가족 간이라고 해도 내용증명을 받아 놓는 게 좋습니다. 여기에 추가해서 원금상환계획 + 이자약정- 계약서의 공증, 실제 이자지급 + 금융기록- 자녀의 재정 능력( 월 수입 등등) 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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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폐위된 후 세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아들 즉 세자였던 이지와 부인은 광해군 폐위이후 폐세자 / 폐빈으로 강등당하고 유배되는데 위리안치되어 아내인 폐빈과 함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배 생활 중 몰래 땅굴을 파고 폐빈과 함께 도주를 시도하다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폐빈은 목을 매 자결했고 이후 폐세자도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으나 역시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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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중 묘호가 없는 임금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묘호가 없는 왕은 조선의 역사 상 총 3명인데 반정 (反正)으로 축출된 연산군 (燕山君), 광해군 (光海君), 그리고 왕위를 강제로 빼앗긴 노산군(魯山君) 뿐이었습니다. 역대 왕들이 재임시 신하들이나 정종 임금의 후손들이 정종에게 묘호를 내려달라고 상소를 많이 올리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거부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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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명이나 청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나라와 직접 교류한 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을 제외 하고는 우리는 왜국과 직접 교류를 했습니다.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동평관(東平館)을 유숙소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의 진상물은 은(銀)·동·연·유황·소목(蘇木)·단목(丹木)·백반(白礬)·감초·호초·수우각(水牛角)·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綿布)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저포(苧布)·마포(麻布)·인삼·표피(表皮) 등으로서 한국과 중국과의 경우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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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 잡혀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이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간 셈입니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고 합니다. 약소국의 첨혹한 시대 상황 을 보여 주는 부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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