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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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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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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1일 작성 됨
Q.
을지문덕 장군은 어떻게 적은 군사로 30만 대군을 물리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살수대첩은 612년(영양왕 23년)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전투 중 하나입니다. 고구려군이 우중문 우문술이 이끈 수나라 군사들을 살수에서 크게 무찌른 전투입니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입니다.(일설에는 요하라는 설이 새롭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우중문이 이끈 수나라 9군은 30만 5천명이었습니다. 군량미와 무기로 인해 그리 빠른 속도로 진군할 수 없게 되자 압록강 유역에 머물고 있을 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나라에 군영에 가서 거짓 항복을 하여 상태를 파악하였고 이후 거짓 패배를 하며 적을 유인합니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의 수군과 합류할 계획이었으나 내호아의 수군은 먼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다 대패하여 포구에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을지문덕은 또 다시 거짓패배를 시인하며 우중문을 현혹시키자 우중문은 회군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회군하는 도중에 우중문 부대 중 설세웅은 평양성에서 퇴각하다가 겹겹히 포위되어 화살공격을 받아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도망치게 됩니다. 고구려군의 결정적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대첩이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의 반정도 건넜을 때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수군의 장수 신세웅을 전사시켰습니다. 살아서 랴오랴성으로 돌아간 이는 2700명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대승이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11일 작성 됨
Q.
조선시대 왕중에 83세까지 장수한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21대 왕인 영조입니다. 재위기간은 1724년부터 1776년으로 53년간으로 조선 역대 왕 중에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정국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1776년 83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11일 작성 됨
Q.
미국에서는 트럼프를 왜 이렇게 지지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미국 중심주의 경제정책과 중국에 대한 강한 압박에 있습니다. 트럼프가 지난 대선부터 주장해온 아메리카 퍼스트는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미국을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국을 우선을 보는 것은 세계인의 관점에서는 자국중심주의로 비쳐지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광기에 가까운 신드롬을 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번 째는 중국에 대한 강한 압박입니다. G2로 떠오른 중국은 더이상 종이호랑이가 아니며 자원을 통한 전쟁을 선포하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미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미국은 중국에 끌려다니지 않는 트럼프의 막가파식을 동경한 것입니다. 또 중국을 통한 북한의 압박까지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
2023년 12월 11일 작성 됨
Q.
명종 재위 시절 을묘왜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을묘왜변 또는 달량왜변은 1555년(명종 10년) 조선 명종 때 일어난 것으로 왜구가 70여척의 배로 전라남도 영암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보루를 불태우고 난동을 부린 사건입니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부사 이덕견은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김경석 남치근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들을 토벌하여 영암에서 크게 무찔렀습니다. 왜구가 물러간 뒤 쓰씨마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수릭하여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역사
2023년 12월 11일 작성 됨
Q.
흥화진전투가 7일동안 버틸수 있던 원동력은?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이 1차 침입 때 강동 6주를 넘겨준 것을 후회하고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는데 때마침 고려에서 강조정변이 일어나자 요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동 6주 중 하나인 홍화진에서 거란의 40만 대군의 공격을 악전고투로 막아낸 이가 양규장군이었습니다. 이에 거란은 20만은 남겨두고 20만으로 개경으로 진군하여 파죽지세로 공격해왔습니다. 이에 강감찬은 현종에게 작전상 후퇴를 건의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항복하지 않고 나주까지 피신하게 됩니다.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은 거란은 서경 통주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 깊숙히 들어온 까닭에 서둘러 후퇴를 합니다. 이때 거란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거란 주력군은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양규장군은 거란이 홍화진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향하자 이웃성들의 남은 병사와 협력하여 거란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고려군의 타격목포는 바로 거란 황제가 빼앗은 물건들과 고려 포로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거란군이었습니다. 양규장군은 고려 포로 1만여명을 구해내고 7000여명의 거란군의 수급을 베었으나 거란 대군의 포위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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