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사수대첩은 어떠한 전쟁 이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석거로 사수의 얼음을 깨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을 꼼짝 못하게 한 뒤, 연개소문은 패강도행군을 급습해 임아상이 난전 중 전사한다.[8]옥저도행군의 총사령관인 방효태는 영남의 수군을 이끌고 사수에 진영을 쳤는데, 연개소문이 사수 언덕에서 방효태에게 맞서 싸웠으며, 방효태가 대패하면서 수만명이 전사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에 가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끌고온 영남 자제들이 모두 전멸했는데 자신 혼자만을 구할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며 싸우다가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9]이후 소정방을 중심으로 살아남은 당군은 김유신의 구원을 받고 식량을 받은후 철군했다고 한다.이 전투까지 당나라는 6개 도행군 가운데 절반[10]이 총사령관을 잃었다. 당 고종의 요구로 고구려 영토 내로 진입해야 했던 신라군과 평양에서 헤메던 소정방군은 적지에서 싸그리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고, 고구려 입장에서는 지긋지긋한 전란을 단 한번에 완전히 종결시켜버릴 기회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의 결정적인 승전이었다.하지만 여기서 김유신의 신라군은 놀라운 기동으로 고구려의 방위선을 우회한 뒤 폭설이 내린 날을 노려 소정방군을 압박하던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풀어냈고, 소정방은 신라가 지원해준 보급품을 받은 뒤 바로 퇴각했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군은 소정방과 김유신 양쪽을 추격했으나,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한 채로 격퇴하는 정도만 성공한다. 비록 당나라군에 대해서는 이미 당나라군 수뇌부의 절반을 공중분해시킨 수준의 대타격을 입혔으니 덜 아쉬웠겠지만, 신라군의 재치있는 대처로 인해 신라군의 수뇌부에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한 점은 많이 아쉬웠을 듯 하다.당나라에서는 소모전 전략에 이어 결정타를 날리려 했으나 이전부터 계속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전쟁 일체의 중단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웅진도독부에 대한 지배마저도 재고하고, 철군하거나 신라에 의탁하려 하였다. 하지만 유인궤의 결사적인 반대로 인해 결국 웅진도독부의 유지를 결정하고, 이는 수년 뒤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하게 된다.
Q. 중국이 중화사상을 가지게된 이유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인(주로 한족[漢族]) 특유의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자 실질적 종교. 골자는 중화 문명(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문화적 역량이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으며, 다른 문명을 오랑캐로 낮잡아보는 사상. 국가 명칭부터가 '중심 국가'라는 의미의 '中國'이다.되려 젊은 중국인일수록 중국 정부의 애국주의 교육으로 인해 중화주의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해외와의 교류가 많은 중국인들의 경우는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중국에서 자국 여권 보유자 비율은 고작 8%밖에 안 된다. 즉, 그 수가 별로 없다.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상주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일로,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던 상황을 당시 문헌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으면서 '중국'과 '중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ㆍ한(漢) 시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전한 시대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지며 오행 사상 등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기본적인 외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주변 민족들을 동서남북 다 털어버리기 전까지는 내부에서도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이 더 남자답다고 여기고 가서 선우가 되어 한나라를 괴롭힌 사람들이나 조타처럼 다른 농경 이민족들의 왕이 되어 나름 부심을 부리고 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 왕조인 당나라 이후부터는 주변국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남송대 이후 발달한 성리학은 천자 중심의 질서를 더욱 크게 강요하였다.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중화 사상이나 중국 문명 자체의 시초[5]라고 볼 수 있는 주나라의 경우 연구 결과 의외로 초기에는 유목민 정복자[6]들이었다. 기록에는 상나라가 매우 포악해서 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주나라 사람들 역시 초창기에는 주변 민족들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Q.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들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주, 군함도, 박열, 말모이, 덕혜옹주, 항거: 유관순 이야기,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모던보이, 해어화, 원스 어폰어 타임, 라듸오 데이즈,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2009로스트 메모리즈, 바람의 파이터 등이 있습니다
Q. 우파 좌파라는 말이 생긴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떤 정치적으로 왼쪽 편에 선 사람들을 좌파라고 하고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우파라고 한다. 이 때 '파' 라는 한자는 派 으로 어디에 속해 있을 경우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사용하는 한자이다. 실사용의 예로는 파벌, 파당, 분파, 편파, 파편 등이 있다. 派, 파라는 한자는 원래 하나였다가 쪼개져 나뉜 후 다시 하나로 되어 있을 경우에 사용한다.좌파와 우파의 비슷한 말로는 좌익, 우익이 있다. 이때 '익' 은 날개 익(翼)이라는 한자로 새의 날개를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라고 표현할 때 좌익, 우익이라고 표현한다. 현재는 비행기의 날개도 같은 표현을 한다. 익(翼)이라는 한자가 사용된 이유는 Right wing, Left wing 이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wing 이라는 단어에는 파(派, party)라는 의미도 있다.정치적 이념에서 유럽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본래 좌, 우라는 위치의 개념이 정치적 신념으로 상징된 것은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Q. 사약이 듣지 않는 체질은 어떻게 죽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약의 성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성분은 비상이다. 비상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해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든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그 외에 초오와 부자도 사약의 성분으로 많이 쓰였으며, 초오, 부자의 주성분인 아코니틴, 아코닌은 중추신경을 초기에는 흥분시켰다가 마비시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사극에서 처럼 바로 먹고 바로 피를 토하는 경우는..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허위에 가깝다고 보시면됩니다..사약자체가 먹고나서 흡수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즉 얼마나 먹고.. 얼마나 빨리 반응하느냐에 따라다른거죠..따라서 어떤이들은 약발이 안나서..사약을 먹이고 뜨거운 방에 가두기도 했습니다..사약이 듣지 않으면 참수형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Q. 리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을 위해서 해부까지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림을 위해 해부했다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해부학서적을 낸적이 있고, 해부학자이기도 했습니다.레오나르도가 해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동기는 화가의 입장에서 사람 몸의 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부를 거듭하면서 사람 몸을 보다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겉모습뿐 아니라 내부 장기들도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열망은 결국 해부학 연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1). 또한 천성적이며 타고난 습관인 관찰을 통해서 사람구조의 상호연관성과 기능에 대한 탐구의욕을 촉발시키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예술가로서의 레오나르도보다 '천재'라는 수식어로 대별하는 것은 식물학, 수학, 지질학, 천문학, 기하학, 광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에까지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예술은 물론, 과학자, 발명가로서의 뛰어난 업적들은 그의 독창성과 창의적 재능, 그리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심의 산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면에서 의사가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이 사생아라는 출생신분으로 인하여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잠재적 의식의 발현이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750여 점에 달하는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그림들은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정확하고 회화적 가치 역시 훌륭하기 그지없어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창의적 재능, 또는 예리하고 분석적인 관찰능력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레오나르도가 죽기 2년 전, 아라곤의 루이스 추기경이 레오나르도를 방문하였을 때, 그의 비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기록을 남겼다. "레오나르도는 팔다리와 근육, 신경, 정맥, 인대, 창자를 자세히 묘사한 사람 해부학 책을 저술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남자와 여자의 몸 구조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오직 눈으로 관찰하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하였다." 비서가 말한 이 책은 아직도 그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원고가 아니었을까?레오나르도는 발가락을 펴는 근육, 즉 '짧은발가락폄근(단지신근)'3)에 대한 참고문헌을 몬디노의 책에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짧은발가락폄근을 최초로 기술한 사람은 몬디노가 아니라 갈레노스(갈렌)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참고한 몬디노의 책은 1482년 볼로냐에서 출판된 개정본이다. 베네데티4)는 볼로냐와 파도바 대학의 의학교수였으며, 1497년에 5권의 해부학 지침서 『해부학』5)을 출판하였는데 이 지침서는 독창성은 없었지만 사람 몸의 구조와 해부방법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외과의사 숄리아크6)는 1363년에 『Cyrurgia Magna』를 출판하였고, 이 책의 프랑스 번역본은 1478년에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갈레노스와 아비센나의 아랍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한 책과 알베르투스7)가 저술한 『De Animalibus(해부학과 동물학에 관한)』를 참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레오나르도가 사람 몸에 관한 연구에서 빈틈없는 해부학자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8). 관찰한 것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렸고 항상 구조와 기능을 연관 지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주로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과 로마의 산토스피리투 병원에서 시체를 해부했는데 날카로운 메스와 끌, 뼈를 자르는 톱을 사용하여 밤중에 비밀스럽게 해부를 실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시체를 보존하는 방부처리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들을 손상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기 위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해부해야만 했다. 또한 쉽게 부패하는 시체를 일주일 이상 관찰하고 해부하면서도 악취나 역겨운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 변화하는 시체의 모습까지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레오나르도가 30구의 시체를 해부했다는 인용문장으로 미루어, 레오나르도의 생애 중 상당부분을 해부학에 쏟아부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그가 남긴 노트에서 해부학에 관한 문헌을 저술하려고 준비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750여 점에 달하는 해부그림들과 광범위한 자료들로 미루어 그가 저술하려고 계획한 해부학 책의 수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해부학 책을 저술하기 전에 이미 책의 내용과 범위를 구상하였는데 아마도 보다 진전된 해부기법과 교수방법을 제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레오나르도의 다각적 능력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분석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