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불교는 다 같은 불교 아닌가요? 원불교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종교인데 핵심은 불교 사상입니다.윤회,생명존중,선,수행,염주.108배 등 불교적인 요소가 많지만 4배,개벽 등에서 보듯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종교인 동학,증산교,성리학도 영향을 받은 종교입니다.성리학의 영향이란 성직자의 권위를 보면 좀 유교적인 면이 있습니다. 어럿을때 산으로 들어가 수행을 한게 아니고 자연과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의심으로 그것에 몰두하죠전통적인 동북아 선불교 "화두"를 잡고 선을 하는 방법과 유사하며 나중에 깨달음을 이루고 금강경 사상을 중심으로 기존불교 사상을 흡수합니다. 신을 섬기지 않고 진리적인 부처님인 법신불을 수행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불교라고 해도 뭐라 못합니다.본인들 스스로 한국에서는 새로운 페러다임에 종교라고 하지만 외국에서는 혁신불교라 선전하죠스승없이 홀로 깨들음을 완성하여 주세불이라 칭하는것은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영향 같습니다.대승불교는 여러 부처님을 인정 하지만 상좌부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Q. 유비, 관우, 장비는 실존 인물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럼요. 유비, 관우, 장비는 실존했던 사람들 입니다.다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처럼 세사람이 복숭아밭에서 도원결의를 했는지의 여부는 알수없습니다. 정사 삼국지에는 세사람이 형제처럼 가까웠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의형제를 맺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 임에는 틀림이 없죠..
Q. 독립운동가는 어떤분들이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주시경 (1876-1914)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선생의 저작 [국어문전음학(1908)]중에서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아버지는 주면석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본관은 상주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 주면진 앞으로 양자 입양되었다. 어려서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신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의 관립이운학교에 들어가 속성과를 졸업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해운계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들어갔다(1896. 4). 때마침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있던 터에, 독립신문사 회계사 겸 교보원(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순한글 신문을 제작하여야 했기 때문에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동료 직원들과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한글 표기법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과 연구를 병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서재필이 추방당하자 독립신문사를 나오게 되었다. 대신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제국신문》 기재를 하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사인 스크랜턴의 한국어 교사를 병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상동청년학원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일을 하면서 공부도 계속 병행하여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서 흥화학교 양지과를 야간반으로 졸업하였고, 정리사에서는 수물학을 3년간 공부하였다. 그 때 나이 34세였다.학업을 마치고 그는 당시로서는 근대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 교사로서 바쁘게 생활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당한 처지에서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애국계몽운동으로는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 등의 활동이었다. 국어운동으로는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그리고 동교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 국어교육과 국어 발전에 앞장섰다. 교사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교사로 재직했던 학교는 간호원양성학교·공옥학교·명신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서우학교이다. 그 밖에 협성학교·오성학교·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보성학교·사범강습소·배재학당 등에서 강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주로 조선어·주산·지리 등을 가르쳤다. 동시에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국어연구운동으로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하여 학교내의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 국문연구회 운영,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그의 저술인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혁신적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그는 학교 및 강습소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한글학의 후진으로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등 수많은 학자가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이 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1911년부터 박동의 보성중학교에 조선어 강습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학교에 출강하면서 국어 교육을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이때의 상황을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최현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선생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아 갔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고, 또 1914년에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한 것 등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몸도 돌보지 않는 한글 연구와 강의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선생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