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홍길동은 어쩌다가 '장길산'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길산은 홍길동의 호가 아닙니다. 보통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남들이 함부로 불러선 안되어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다시 짓습니다. 그게 '호'라고 합니다. 이이선생을 이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보게 율곡선생' 이렇게 부르는 것이지요. 아무튼 장길산, 홍길동, 임꺽정은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불립니다. 조선시대 후기 성호 이익선생은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이야기를 적어놓았습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의 조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해 많은 백성이 도적떼에 가담하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은 서로 다른 사람임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Q. 예전 대통령한테 각하 라고 하던데 요즘에 각하를 안쓰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폐하는 황제를 칭하는 말입니다. 궁전에 오르는 계단을 폐라고 불렀는데 거기에서 따온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황제는 없었으니 큰 의미가 없는게 폐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전하, 합하, 각하가 있습니다. 셋다 건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보통 ~~전에 사는 사람에게는 전하라부릅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사는 사람...임금이죠. 바로 전하!!~~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임금과 부처뿐이었습니다. ~~합은 왕실 종친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각은 정승, 판서의 집무실에 붙이는 이름이었습니다. ~~전, ~~합은 왕실사람들 그 다음으로 ~~각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각에서 있는 각하라 할 수 있습니다.
Q. 우리나라 '한글'은 언제 만들어 졌나요?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 정확히 훈민정음이라 불리는 한글은 세종대황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반포되었습니다. 한자, 알파벳, 아랍어 등 많은 문자는 누가 제작했는지 언제 만들어졌는지 불분명합니다. 유일하게 훈민정음만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훈민정음 설정책입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고, 원리는 무었인지 정확히 적혀있습니다. 제작자의 의도를 담은 책이죠. 그 책에는 1443년 음력 12월 말은 알아도 글을 몰라 고통을 느끼는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
Q. 전세계 문자 중 한글처럼 인위적으로 만든 문자는 또 어떤 것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세계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중국의 갑골문자 그리고 이외의 문자로 나뉠수 있습니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페니키아, 그리스, 아랍, 몽골 등의 문자에 영향을 미쳤으며,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갑골문자는 한자로 발전해 서하문자, 여진, 일본의 가나 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문자들은 누가 만들었는지 불분명하며 자연발생, 많은 사람들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문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거기다 배우기 쉽고, 발음도 다양합니다. 실예로 문자가 없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부족국가들은 훈민정음을 채택해 문자로 사용하기도 한다죠
Q. 거북선의 설계와 건조 방법은 어떻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북선은 임진왜란시 돌격선으로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알려진바와 같이 거북선은 나대용이라는 군관이 맡아 만들었습니다. 다만 거북선이라는 기록(귀선)은 태종대부터 있었습니다. 조선초기부터 꾸준히 개량 발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795년에 발행된 '이충무공전서'라는 기록에서 '귀선도설'이라는 설계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거북선 설계도를 연구하니, 거북선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맨아래층은 휴식공간과 창고, 2층은 격군, 3층은 포를 쏘는 공간으로 구성됐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거북선은 태종때부터 연구해 선조때 완성했고, 19세기까지 개량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Q. 홍범도 장군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홍범도 장군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지 노동자, 승려, 농부, 포수(총을 쏴 동물을 잡는 사람)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다 민족의식에 눈을 떠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해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 이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화 이 후의 일생은 약간 슬픕니다. 독립군 내의 갈등, 무장해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등을 당하며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아직도 중앙아시아에 고려인 이라불리며 당시 강제이주 된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계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