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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이동광 전문가
카이로스 아카데미
Q.  마누라 라는 단어는 상대를 하대하는 건가요? 정확하게 어떤 어원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마누라’는 산스크리트어 “마누(Manu)” 또는 티베트·몽골어계 언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고려·조선 시대의 상류 여성에 대한 존칭인 “마누하” 또는 “만호(萬戶) 부인”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입니다.“마누하(媽奴下)” 혹은 "마노하”라는 표현은, 고려나 조선 초기의 문서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높은 지위의 여성이나 상류층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이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마누라’로 변형되어 평민 가정에서도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로 확산된 것입니다.
Q.  전하 라는 칭호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길레 왕에게 썼던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전하(殿下)'는 조선시대를 포함한 동양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나 왕족에게 올리는 존칭 중 하나로, 상대방의 신분을 높여 존중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칭호입니다.'전하'라는 단어는 전(殿)은 궁궐, 전각 또는 왕이 머무는 곳을 의미하며, 하(下)'는 '아래'라는 뜻이지만, 이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표현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의미로 사용된 겸양의 표현입니다.따라서 ‘전하’는 문자 그대로는 “전각 아래 계신 분”이라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전각에 계시는 지엄한 분", 즉 왕이나 황제를 지칭하는 극존칭으로 쓰입니다.
Q.  당나라시대의 여성 지위와 역할은 어땠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당나라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가 강하게 지배했던 송나라 이후 시대와는 달리,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성격을 지닌 시대였습니다.북방 민족과의 교류, 불교와 도교의 영향, 실크로드를 통한 외국 문화의 유입 등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느슨했고, 사적 공간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또한 당나라에서는 여성도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시문에 능한 여성 문인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류 시인 적경(魚玄机)은 아름다운 시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 외에도 여러 궁정 여성과 기녀들이 문학 활동에 참여했습니다.마지막으로 당나라 법률은 여성의 이혼권과 재혼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여성도 원하면 이혼을 청구할 수 있었고, 재혼 역시 가능한 사회 분위기였습니다.일부 여성은 혼인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기녀나 문인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Q.  중원에서 흉노족이 사라진이유와 이후 어떤식으로 잔존하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한나라 시대 초기, 흉노족은 북방 유목 민족 중 가장 강성한 세력으로, 중원 왕조인 한나라와 오랫동안 대립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흉노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결국 중원 역사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우선 한나라의 적극적인 군사 압박으로 흉노의 기반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특히 곽거병의 공격으로 흉노의 경제 기반인 목축 지역이 타격을 받았고, 여러 부족이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또한 기원전 1세기경, 흉노 내부에서 후계자 분쟁이 벌어지며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습니다. 남흉노는 한나라에 투항해 속국화되었고, 북흉노는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점차 세력이 쇠퇴합니다.마지막으로 선비족, 저족, 강족, 그리고 후대의 유연족이나 돌궐족 등 새로운 유목 민족들이 부상하면서 흉노의 잔존 세력은 이들 속에 흡수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났습니다.다음으로 흉노족이 어떻게 잔존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남흉노는 이후 한나라에 복속되어 내지로 이주되었고, 일부는 후에 오호십육국 시대에 군벌로 성장하여 전조(前趙)라는 국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전조의 건국자 유연(劉淵)은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 황족 성씨인 '유(劉)'를 사용했습니다.또한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역, 즉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훗날 훈족(Huns)으로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훈족은 4~5세기에 유럽에 침입해 게르만 대이동을 유발하고 서방 로마 제국의 붕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Q.  동학의 김개남은 왜 즉결처분이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전봉준은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쳐 사형되었으나, 김개남은 재판 없이 즉결처분(총살)되었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전봉준은 항복 후 붙잡힌 인물이었으며, 그동안의 활동이 비교적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지도자로서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정부는 그에게 재판을 통해 정식으로 죄를 묻고 형을 집행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그를 재판에 넘기면서 동학운동을 국가 반란으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했습니다.반면, 김개남은 전봉준보다 과격한 무력 투쟁을 주장했던 인물로, 1895년 3월, 전봉준보다 약 두 달 늦게 체포되었습니다. 김개남은 재차 봉기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체포될 당시에도 군사적 저항을 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정부는 그를 체포 즉시 반란 재시도 세력으로 간주하여 재판 없이 즉결 처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김개남은 단순히 과거 농민운동 지도자가 아니라 당시에도 여전히 위협적인 반란 주동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와 일본군은 신속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결론적으로, 전봉준은 정치적 상징성을 이용하여 공권력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재판 절차를 거쳤고, 김개남은 즉각적인 위협 요소로 간주되어 사전 재판 없이 즉결 처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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