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도병의사사가 왜 원나라 간섭기에 발전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도병의사사의 권한이 원나라 간섭기 동안 강화된 이유는 고려의 정치 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도병마사는 원래 군사 및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임시 회의기구였으나, 원 간섭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및 관료 집단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면서 점차 상설화되어 국정 운영의 핵심 기구로 발전했습니다.특히 원 간섭기에는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한 권문세족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도병마사를 중심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을 견제하거나 보완하는 기구로서 도병마사의 권한은 더욱 확대되었고, 군사·외교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Q. 고려 예종이 남긴 업적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예종은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도 교육기관인 향교를 설치하여 교육 제도를 체계화하였으며, 유학을 장려하고 학자들을 우대함으로써 학문과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또한,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설치하고, 여진족 정벌을 단행하여 북방 방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북 9성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외교적 문제로 인해 이를 반환하게 되기도 했습니다.문화적으로는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천태종을 후원하고 사찰을 중창하는 등 불교 발전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종은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내치와 외교,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서 고려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Q.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7세기 중반, 특히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외교 사절로 보내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하고 있으며,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당시 동북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 분쟁에 개입할 명분을 얻게 되었고, 신라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따라서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이유는 단순한 외교 관계가 아니라, 고구려·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한반도 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신라의 초대왕의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신라의 초대왕은 박혁거세 입니다. 그의 건국 신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기원전 69년, 진한 지역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정하려고 모였을 때,나정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고, 하늘 말이 끄는 수레가 나타나 알을 품은 큰 자줏빛 알이 내려왔습니다. 그 알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의 모습은 특별히 아름답고 신성하여 모두 감탄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박’이라는 성은 그 알이 박(호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집니다.이후 그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으며, 후에 신라로 불리게 됩니다. 또한 하늘에서 하강한 또 다른 인물인 알영이라는 여인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그녀 역시 신성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박혁거세는 61년간 재위하고, 죽은 뒤에는 시신이 하늘로 올라갔으며, 몸이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각각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덧붙여집니다.이 신화는 박혁거세가 하늘의 명을 받은 존재로서 신성한 출생을 통해 왕권을 정당화하고, 다양한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연결, 자연의 기운, 동물의 상징(말, 계룡 등) 등을 통해 고대 사회에서 왕을 신성시하는 관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국 신화입니다.
Q. 장보고가 신라에서 숙청된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장보고는 통일신라 중기에 활약한 해상 무장으로, 당대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며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막강한 세력은 결국 중앙 정치의 견제를 불러왔고, 이것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력을 쌓은 뒤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며 해상 교역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불교 신앙과도 연계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하고, 신라 상인과 유학생, 승려들을 보호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지방 군사력은 물론, 경제와 외교적 통로까지 장악한 상태였기에 신라 중앙 귀족 사회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장보고는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으며, 특히 신무왕의 즉위 과정에 개입하거나 왕실 혼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진골 귀족과 혼인시키는 등 왕실과의 연계를 시도하면서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는 귀족 중심의 중앙 정치 구조에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결국, 846년(문성왕 8년), 신라 조정은 장보고의 권세를 두려워한 왕실과 귀족 세력에 의해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조정은 염장이라는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게 하였고, 그는 결국 정치적 견제와 왕권 강화를 위한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